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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17. 2019

아버지 빽은 나의 능력인가

부모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미국

회사에서 누군가가 기사 하나를 공유하여 전체 이메일로 뿌렸다. 도입부를 읽어 보던 중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 부분에 눈에 꽂히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읽고 지나갔을 만한 내용이었지만 나에게는 눈에 밟히는 내용이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If you are an investment banker and you want to win a mergers-and-acquisitions mandate, you do the usual things. You gain favor with the company by lending it money and giving it free advice, and you butter up its senior executives by taking them out to dinner, playing golf with them, and recommending their kids for internships.


요는, 투자은행이 영업을 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와 골프도 치고, 저녁도 사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는데 그중 하나로 클라이언트의 자녀에게 그 투자은행에서의 인턴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새로운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말로 일간지 사설에 언급되는 것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미국에 와서 깨닫고 당황해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 여기서는 소위 부모님 빽을 이용하는 것, 특수관계인 인맥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는 일이 완전히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명문대를 나오면 자식도 그 명문대 입학에 유리한데 아예 그러한 내용을 입학 원서에 공개적으로 쓰는 칸이 있다. 그 아버지가 기부금을 낸 적이 있다면 아들의 입학은 더 유리해진다. 만약 그 아버지가 기부금을 오래전부터 꾸준히 내 왔다면 아들의 입학은 더욱더 유리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심지어 부모가 유력 기업 회장, 정치인 등 잘 알려진 유명인사라면 굳이 기부금을 내면서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 유명인의 자제라면 최고의 경영대학원 등에서 알아서 잘 뽑아 간다. 당사자는 지원할 때 자기 정체를 잘 알리기만 하면 된다.


문제 제기를 할 만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백인 국회의원의 딸과 라티노 이민자의 아들이 신분 격차를 딛고 사랑에 빠지는 달달한 멜로물이었다. 여기서 여주인공과 그녀의 국회의원 아버지가 갈등을 빚는데, 남주인공이 그 현장에 있다가 둘의 갈등 해소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자 그 국회의원 아버지가 남주인공에게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다. 남주인공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자 그 국회의원 아버지는 당장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한다. 그 남주인공은 그 추천서로 인해 바로 해사에 입학하게 된다. 영화는 부녀 갈등이 해결된 여주인공이 해군사관학교에서 파일럿 옷을 입고 찍어 보내온 남자 친구의 사진을 보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나는 ‘저게 저런 식으로 해피 엔딩을 만들어도 될 만한 내용일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이 자기 딸 남자 친구이라고 한 20분 딱 보고 추천서를 써 줘서 그 녀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SAT 치고 봉사활동도 했지만 국회의원 추천서를 받지 못한 학생들은 뭐가 되는가? 저런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좋다고 해피엔딩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내가 회계법인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꽤 오래전에도 여름 인턴 학생들 중 상당수가 유학 중에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들어온 클라이언트 자녀 거나 법인 파트너의 친구이거나 했다. 군대에서도 내 훈련소 후반기 동기는 자기가 어느 자대로 배치받을지 미리 알고 있었다. 인턴이나 군대 정도를 넘어 아예 사기업은 물론 공기업 공채 자리에 아들을 바로 꽂아주는 누군가의 아버지들도 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쉬쉬하며 이루어지고, 알려졌을 경우 사안에 따라 크고 작은 사건들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행위는 일반적으로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야기한다. 나도 주변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나와 얼마나 관련되었느냐에 따라 씁쓸함, 냉소 그리고 분노를 느껴 왔고 그것이 당연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정서 자체가 공유되지 않으니 나는 혼란스러웠다. 답을 찾아야 했다. 이 사람들은 왜 그럴까?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까? 부모덕으로 진학이나 취업에 특혜를 입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이 사람들은 왜 그럴까에 대해 내가 찾은 한 가지 설명은 미국의 개인주의가 가족/커뮤니티 중심의 이기주의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삶이 가족 중심적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고, 사실 내가 미국에 정착하기로 하면서 바라고 기대하던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이 가족 중심적이라 좋기는 한데 가족 공동체 단위로 이기적이라는 것은 최근에야 느꼈다. 아이 유치원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는데 학부모회 회장의 아이가 조금 손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회장이 학교에 찾아와서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되든 전체적인 공정성이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아이에 맞게 규정을 바꾸어버렸다. 그 배려 없음과 신속함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변호사라니 관련 규정을 다 파악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처음에 유치원이 Co-op, 즉 협동조합 형식이라고 했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의사결정 구조상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학부모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는 이런 식으로 당하고만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가족이나 그보다 다소 큰 지역 공동체, 이익 공동체 등에 흔히 큰 소속감을 가지는데 그보다 더 큰 커뮤니티에 사는 타인들, 나아가 사회 구성원 전체에 대한 예의나 존중은 다소 부족하다. 잘 살고 힘 있는 백인들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의 한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의원들에게 로비를 해서 비행기가 지나가는 항로를 강 건너 메릴랜드 쪽으로 변경시켰다. 이런 일을 벌이면 당연히 한쪽에서는 손해를 보는 동네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생기는 것도 자명하다. 그런 비판에 대해 신경 쓸 만도 한데 신경 쓰지 않고 관철시켰다. NRA(전미 총기 협회)는 끊이지 않는 총기 난사 사건들로 민간인들, 어린 학생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계속한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당연히, 내 자식이 내 덕에 명문대 입학이나 유수의 회사 입사를 할 수 있을 때 남의 자식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두 번째 설명은 미국의 방식이 실질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고 미국은 이를 공정성의 가치보다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대학/대학원의 입장에서는 시험 점수가 좋은 평범한 집안 학생들만으로 학교를 꽉 채우기보다는 기부금을 내는 큰손의 자제, 유력 기업 회장의 자제, 유명 정치인의 자제를 학교 동문으로 받았을 경우 당장 그리고 미래의 기대 이익이 훨씬 커진다. 학교의 재정과 명성, 기업과의 관계 등 모든 것에 플러스가 되니 입학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도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 설사 기업 회장의 자제 때문에 떨어진 학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입장에서는 그가 왜 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으니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고 따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어떠한 손해도 없다. 회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클라이언트 자제를 회사에 뽑아 주는 것은 곧바로 그 회사의 매출과 이익의 지속 가능성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이윤 극대화의 추구 속에 희생되는 것은 공정성의 가치이지만 확실히 이 곳은 한국과 비교하면 공정함에 대한 요구가 낮은 편이다. 모두가 비슷한 외모를 가졌고, 추구하는 가치나 취향이 비교적 획일적인 한국에서는 네가 무언가를 한다면 나도 그것을 해야겠다는 심리가 강하고 그것이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 때로는 효율성이나 이익이라는 가치보다 더 - 중요하게 만들지만 미국처럼 다양성이 극대화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상류층 백인, 중류층 백인과 아시아인, 라티노와 흑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그들끼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는 미국에서 한국 수준의 공정성을 요구했다가는 나라 전체가 논쟁 속에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원래부터 사람을 뽑을 때 추천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좁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력서만 봐도 이 사람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 비해 전 세계의 이민자들이 모이는 미국에서는 누군가의 이력만으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검증된 사람의 추천이 중요했을 것인데, 검증된 사람의 자녀 또는 친인척이라면 신분이 확실하니 더욱 신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미국은 다르다' (또는 미국은 나쁘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찝찝해서 나는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어 졌다.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 능력으로 진학이나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떳떳하고 부모의 능력으로 성공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 나의 (한국적인) 생각인데, 과연 어디까지가 나의 능력이고 어디서부터 부모의 능력인 것일까.


내 능력은 나의 타고난 본바탕과 교육/성장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먼저, 내가 좋은 머리나 특별한 소질, 타고난 끈기 또는 우월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일단 부모 덕이고 거기에 운도 좋아 유전자 조합이 잘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모 또는 양육자가 나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물적, 심적으로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었는가에 따라 우리의 능력은 크게 좌우된다. 우리는 부모의 재산이나 영향력은 보통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 나의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스스로의 것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 가용한 자산을 -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나의 지적/신체적/정신적 능력이든, 직접적인 부모의 재산/영향력이든 - 최대한 활용하여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반대로 부모는 자신의 신체적/지적/물질적 자산 모두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본능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국 스타일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과연 옳을까? 


모르겠다.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한국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내 자식이 먼 훗날 입시나 취업에서 만약 내 덕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별 문제가 없는 일이라면 내가 마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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