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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Feb 03. 2019

눈이 많이 와서 오늘 회사는 문 닫습니다.

다음번에 이보다 적게 오면 반차 드릴게요

몇 주 전 주말에 폭설이 왔는데 일요일에 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문자가 왔다. “xxx HQ is CLOSED, due to inclement weather conditions.” 눈이 많이 와서 회사가 문 닫는다는 소리인데, 집에서라도 일은 하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냥 쉬라는 이야기인지 잠시 생각했다. 일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이 경우는 그냥 쉬라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집에서 아주 푹 쉬었다.


지난주에는 밤 사이에 폭설은 아니고 그럭저럭 눈이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사에서 또 문자가 왔다. “xxx HQ OPEN, with 3 hours delayed arrival. Staff have the option for unscheduled leave or home-based work.” 눈이 많이 왔지만 회사가 문 닫을 정도는 아니니 3시간 늦게 출근하거나, 오늘 휴가를 내 버리거나 집에서 일을 하거나 셋 중 선택하라는 이야기다. 3시간 늦게 출근하면 점심시간이기 때문에 이건 사실상 반차를 준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문자를 처음 받아볼 때는 우리 회사 참 좋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휴무나 지연 출근 등은 우리 회사가 단독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고 미국 연방정부 스케줄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정부기관 전체와 국제기구들이 폭설일 경우에는 휴무, 눈이 적당히 오는 경우 사실상 반차를 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 불만이 전혀 없고, 당연히 너무 좋다. 그런데 한국에서 일하다 온 사람으로서 - 눈이 오고 태풍이 불어도 그 날씨를 뚫고 제시간에 출근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에서 일하다 온 사람으로서 - 이런 것들은 사실 좀 어색했다. 대체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미국인들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가정 중심적인데 반해 한국인들은 모두 일에 중독된 자본주의의 노예라서 그런가?


뭐... 완전히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서울은 훌륭한 대중교통과 공공서비스 시스템이 빈틈없이 돌아가는 효율적인 도시다. 폭설이 와도 지하철은 정시에 다니고, 지하철이 거의 모든 사무실 동네를 다 커버한다. 도로 위 제설 작업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서, 군인이 아닌 이상 자기가 사는 곳 눈을 치울 일도 거의 없으며 버스나 마을버스도 정말 외딴곳이 아닌 이상 잘 다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지도 않는다. 사실상 대부분의 직원들이 출근에 큰 문제가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반면 워싱턴 DC는 절반 이상의 직원이 (특히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인근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출퇴근한다. 역세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철로 출퇴근하겠지만 지하철이 닿지 않는 교외에 살면서 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대부분 싱글 하우스나 타운 하우스에 사는데, 눈이 오면 집 앞의 눈은 당연히 사는 사람이 치워야 하고, 큰길까지 나가는 샛길까지도 제설차가 못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사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조금 외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눈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눈이 많이 오면 출근에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도 막히는 출근길 정체가 심화될 것은 뻔하니 3시간 여유를 주거나 아예 집에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회사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 많이 오면 학교도 쉬거나 등교시간을 2시간씩 늦추거나 한다. 만약 학교가 쉬게 되면 맞벌이를 하는 집은 당장 어린아이들을 집에서 봐줄 사람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라도 부모가 재택근무나 휴가를 신청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중간급 이상일 수록 가족이 있고, 교외에 있는 싱글 하우스에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눈이 오면 어차피 정상 스케줄대로 회사가 돌아갈 수 없다. 종합하면 여기 사람들이 눈이 올 때 회사를 쉬거나 늦게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지하철 통근 및 아파트 거주자는 덕분에 덩달아 혜택을 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미국이 다 이러냐면 또 그렇지는 않다. 내가 보스턴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도 학교가 눈 때문에 휴교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로 그럴만한 날씨였다. 장엄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이런 날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Blizzard가 왔을 때만 휴교였다. 겨울이 워낙 추운 보스턴에서는 웬만한 폭설에는 그냥 스노우 부츠를 신고 등교한다. 공공 제설작업도 매우 훌륭하다 (공공 서비스 중 한국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거의 유일한 분야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DC 지역은 사실 엄살이 심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역시 겨울이 추운 시카고의 상원의원 출신인 오바마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DC 지역에 눈이 내려 정부기관이 휴무되는 것을 보고 무슨 이런 정도로 휴무를 하느냐고 황당해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아마도, DC 지역은 보스턴이나 시카고에 비하면 날씨가 온화하고 눈도 자주 오지 않는 편이어서 가끔씩 눈이 왔을 때 휴무를 하거나 지연 출근을 하는 것이 평소에 빈틈없이 폭설 대비태세를 갖추는 것보다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보면 기후(활동하기 힘든 날씨 이벤트가 잦은지 그렇지 않은지)나 지리적 조건(1가구 주택 중심으로 넓게 흩어져 사는지 아파트 및 공동 주택 중심으로 좁은 공간에 모여 사는지)이 사회적 가치(가족과 가정생활을 더 중시하는지 일과 성취를 더 중시하는지) 못지않게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모습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몇 가지 겹쳐지면 나 같은 사람은 ‘여기는 내가 살던 곳과 생활양식이 왜 이리 다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화적 차이가 그러하듯, 차이의 요인은 항상 다양하고 다층적이며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의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이제는 DC 지역에서 왜 눈이 오면 회사를 쉬거나 지연 출근을 시키는지 알 것 같다. 이제 알았으니 겨울 가기 전에 눈이나 또 한바탕 왔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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