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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Mar 11. 2019

남자는 늙으면 쓸 데 없어

내조의 왕인 줄 만 알았던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나이가 들면서 더 잘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아버지의 내조를 잘하시는가이다. 평생 아버지를 도와 함께 나가 일을 하시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까지 다 챙겨하셨던 것만 봐도 충분히 내조 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요즘은 그런 것 보다 어머니가 얼마나 세심하게 아버지의 심리적인 면까지 잘 챙겨 주는지가 눈에 더 들어온다. 예컨대 아버지를 능력자라고 은근히 치켜세워 주고, 이것저것 하고 싶어서 주도하면 잘 따라가 주고, 무신경한 아들인 나의 옆구리를 찔러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하라거나 아버지가 필요한 것을 내게 콕 찍어주며 사드리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평생 자기 하고 싶은 건 거진 다 하면서 사신 분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머니를 좀 더 챙겨 드리고 싶어도, 내가 그런 말을 꺼낼 때면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동시에 챙긴다. 여행을 보내 드리려고 했을 때도 꼭 아버지와 함께 가겠다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진심 존중하면서 또 의지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불현듯, 매우 차분한 말투로 ‘남자들은 늙으면 쓸데가 없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뭐라고??”


그러자 어머니가 더욱 차분히 확인사살 멘트를 날렸다. “남자들은 늙으면 당최 쓸 데가 없다고. 봐라, 너도 그리 오래 안 남았어.” 요지는 이랬다.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손주들을 봐준다던가, 음식을 하거나, 집안일을 한다던가 하면서 가정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담당하지만 남자는 은퇴하고 하면 바로 삼식이가 되고 (삼시 세끼 챙겨줘야 하는) 하는 일도 없이 밖에서 돈만 쓰거나 쓸 데 없는 일을 벌여 모아놓은 돈을 날리기나 하고, 음식이나 다른 집안일을 할 줄도 모르며 애들하고 놀아주는 법도 모른다. 그런데 은퇴 전 직장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또는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대접받던 버릇은 남아서 집에서 잔소리만 많아지고 짜증만 는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웃으며 잘해 주고 있었다니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데 솔직히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아버지는... 저 모두에 해당되는 진성 삼식이는 아니라고 변호해 주고 싶다).


이 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우연히 TV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사자 무리에 대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한마디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늙은 남자'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되었는데, 지나치게 공감하고 말았다. 내용은 이랬다: 사자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무리는 대장 수컷 하나와 여러 암컷들 그리고 그 슬하 자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생활을 하는데 한 암컷이 노화/부상으로 인해 무리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다가왔다. 암컷은 엄마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딸의 지속적인 육체적 정신적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결국 결단의 시간이 오자 암컷은 자신의 친한 동료 암컷에게 딸을 부탁하고는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 암컷은 평소에도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잘 지냈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역시 딸과 동료들의 지원 속에 따뜻하고 외롭지 않은 이별을 했다. 그런데 수컷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젊고 힘 있을 때는 혼자 왕 노릇을 하며 지냈고 다른 구성원들과 잘 지내기보다는 주로 힘으로 군림해 왔다. 심지어 아들들이 커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싸워 쫓아내 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노화로 힘이 떨어지는 순간이 오자 귀신같이 다른 수사자가 와서 싸움을 걸어왔고 싸움에서 패배한 수컷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쓸쓸히 남아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 수컷의 운명인가...’ 뭔가 씁쓸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좀 더 관계 중심적인 암컷들은 젊으나 늙으나 따뜻한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를 지원하고 지원받고 하는 데 익숙하다. 반면, 좀 더 권력 지향적인 수컷들은 대부분 권력관계 외에 어떤 커뮤니티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서툴다. 젊은 시절에는 힘(돈, 권력, 때로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이용하여 주변에 사람들을 모이게 할 수 있지만 늙어서 힘이 떨어지면 지원해 주는 사람도 없고, 더 이상 ‘쓸 데 없는' 존재가 되어 그저 외롭게 쓸쓸히 말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얼마 안 남았다고 한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나도 이제 길게 잡아야 25년 남짓이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렇게 늙고 외로운 수컷이 되어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쓸 데 없는' 인간 취급을 받으며 쓸쓸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사자든 인간이든 수컷의 본능에만 충실히 따라 살다 보면 결국은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늙으면 무조건 힘이 떨어지는 동물과는 달리 사람의 수컷은 늙어 죽을 때까지 돈과 권력을 쥐고 있으면 가정 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하드 파워'를 평생 놓지 않으며 사는 것보다 일부 ‘소프트 파워'로 전환하는 쪽이 왠지 좀 더 행복해 보인다.


미국에서 다양한 국가 출신들을 보며 느끼는 것은, 확실히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사회 변화가 비교적 천천히 일어나고 차곡차곡 쌓여왔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이 현재 사회의 모습을 잘 따라잡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남자들이 집에서 요리도 잘하고, 집안 일도 많이 하고,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며 친구처럼 지내고, 자기만의 취미도 확실히 가지고 있는 등 은퇴 이후에도 독립적이면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스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 출신이나 (사회 변화가 비교적 빨리 일어나서 사람들의 인식이 상당 부분 예전에 머물러 있고 현재 사회의 모습을 아직 따라잡지 못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기타 개도국 출신 (사회 자체가 아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주로 움직이고 남성/가장의 지위와 권한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남자들은 그 정도의 스킬은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고, 상대적으로 좀 더 일에만 올인하며 가정에서의 역할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즉, 의존적이면서도 외로운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생각해 봤다. 자칭 ‘요즘 한국 남자'로서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내가 집에서 요리는 좀 한다는 것이다. 밥을 신속하게 그러면서도 적당히 맛있게 차려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늙어서도 집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있다. 집안 일도, 육아도 역할을 분담해서 한다. 반면 나에게 아직도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아이들과 '성심성의껏' 놀아주는 것이다. 몸으로 몇 번 들었다 놨다 하거나 잠깐 동안 마음껏 귀여워해 주는 건 할 수 있어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끈기 있게 놀아준다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 잠깐 놀아주고 나서는 바로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그러고 보니 와이프와의 대화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다. 와이프는 항상 자기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면서 공감해 주기를 원하는데 나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대화를 끝내려고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본능을 억누르며 끝까지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즐겁게 놀아주며 친구 같은 아빠가 되기도 쉽지는 않다.


와이프한테 사자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했더니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그러니 나한테 잘해."라고 한다. 그래, 와이프한테도 잘하고(얼마나 더?) 아이들하고도 진심으로 대화를 하면서 관계를 잘 형성해 나갈 필요성을 느낀다. 수컷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을 조금씩은 거스르면서 행복한 노년을 위해, 평생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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