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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Apr 07. 2019

알콜 중독인 예쁜 누나

술 권하는, 또는 술 땡기는 한국

한국에 살 때보다 외국에 살면서 오히려 한국 TV를 자주 보게 된다. 한국 생각이 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시 보기가 공짜로 지원되는 플랫폼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요즘은 한국 드라마 보기가 더욱 쉬워진 탓인지 (Netflix에 한국 TV 프로그램이 많이 올라와 있고, 한 번이라도 시청하면 그다음부터는 계속 추천작품으로 뜬다)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몇 편 보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였다. 내가 이 작품을 보게 된 이유는 손예진이 변함없이 예쁘고 초반 전개가 흥미로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전반적인 배경이 나의 한국 향수병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덤덤하게 그려지는 직장인들의 삶과 한국의 겨울 풍경을 보며 요즘 한국의 분위기는 저렇겠구나, 한국의 직장생활은 여전하구나 등의 생각을 하며 내용을 따라가기보다는 그저 구경하는 느낌으로 봤다.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를 몇 편 보면서 진심 놀란 점이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들이 극 중에서 끝없는 음주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에 몇 년 살았더니 그런 광경이 너무도 튀어 보였다. 특히 손예진과 극 중 단짝 친구는 거의 알콜중독이 확실해 보일 정도로 술을 입에 달고 사는 것으로 나왔는데, 일단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 장면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드라마에 나온다는 것이 놀라웠다. 음주장면 없이는 드라마 스토리가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일까. 이게 미국 드라마였으면 아마도 후반부는 Rehab (재활시설)에 들어가 알콜중독을 벗어나려 애쓰는 애인과 누나를 옆에서 쓸쓸히 바라보며 지원하는 남주의 휴먼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의 음주 (사진은 모두 인터넷 이미지 검색으로 가져왔습니다)

음주를 권장하는 한국의 미디어가 문제일까, 아니면 음주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한국의 스트레스 가득한 사회 및 기업 문화가 문제일까... 저렇게 살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등의 생각을 했다. 미국에 온 이후로는 술을 마시는 횟수도 적어졌고 마셔도 맥주 한잔 이상 하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나의 이런 심심한/건전한 생활과 대비되어 드라마 장면은 더욱 문제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쯤 때마침 손예진과 남주의 달달한 로맨스 장면이 대거 방출되기 시작했다. 애 둘 아빠이자 기혼자로서 이젠 그런 달달한 장면을 보는 것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 딱히 없어서 그쯤에서 드라마 시청을 접었다 (‘그렇게 달달하게 연애하다 잘 되면 몇 년 후 너희도 애 키우면서 등골이 빠지는 길로 가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한가운데 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여의도에서 예전 직장 동료와 선배를 만났다. 1차에서 만나 식사를 하면서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떤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선배는 내가 한국을 뜬 이후에 회사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회식을 잘 하지 않을뿐더러 하더라도 1차에서 끝내는 것이 요즘 대세라고 했다. ‘드디어 한국도 가족 중심적인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긍정적인 변화라고 느꼈다. 그렇게 1차 자리에서 식사와 적당한 음주를 하고 충분히 많은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눈 후에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요즘 분위기에 맞게 1차 후 파하는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나의 중추신경계가 무언가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낀 것인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한잔 더 할까요? 그냥 가기 아쉬운데... 어디 오뎅 바 같은데라도 가서…” 선배는 평소에 술을 많이 먹지도 않는 이미지인 내가 술을 더 먹자고 한 것이 낯선 듯했다. 아무튼 나의 절실한 표정을 보고는 모두 같이 한잔 더 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번에는 친구들을 압구정에서 만났다. 그간 무슨 유행이 불었는지, 예전 같으면 학교 앞 주점이나 시장 식당 같은 곳에서 팔던 파전, 보쌈, 황태구이 같은 메뉴들을 ‘컨템퍼러리 코리안’이라고 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맛있는 한식을 먹으니 술이 그야말로 술술 들어갔다. 늦은 시간까지 잘 놀고 길에 나왔더니 도시의 어둠과 불빛들이 추운 겨울 날씨와 함께 어우러진 때문인지 왠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지면서 술이 더 땡겼다.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의 차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강 양쪽으로 펼쳐진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을 보자 가슴이 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서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한 잔 더 해야 해.’


나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자기 조절 능력이 좋아져서 ‘한잔 더’ 같은 말은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미국에서는 별로 술맛이 안 났던 거였다. 상대적으로 시골스러운 곳에 살아서 그런 걸까, 즐겁게 함께할 예전 친구들이 없어서 그런 걸까... 분명 가드를 내리고 자유롭게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오래된 친구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대도시의 화려한 밤 풍경과 도시생활 특유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의 외로움과 음주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는 미디어의 탓도, 직장문화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불이 꺼지지 않는 화려한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이 기본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밤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한 불빛이 우리를 둘러싸고 좀 더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도록, 좀 더 놀고 싶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대도시... 미국에서는 맨해튼 정도가 아니라면 이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은 워싱턴 DC 근교의 그나마 urban area라고 불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웬만한 중소도시보다 상업시설/인구 밀도가 떨어진다. 밤이 되면 별로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고 그저 빨리 자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이 밤의 끝을 잡고 달리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기 힘든 환경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술 마실 일이 적은, 어쩌다 마시더라도 한잔 정도만 하는 스타일의 삶으로 바로 돌아왔다.   


결론은, 한국의 술 많이 마시는 생활은 여러 사회적 조건들이 맞아 들어가서 그렇게 형성된 것이고 어느 한두 가지 원인을 지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대학 다니고 일하고 하면서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나는 특별히 술을 좋아하거나 술자리를 주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저 상황이 되면 빼지 않고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렇게만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 음주에 두세 달에 한 번씩 과음은 일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사회생활에서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고 인생사는 윤활유 내지는 낭만같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금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과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서구 선진국의 건전한 삶은 좋고 한국의 대도시적인 삶은 안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 대도시는 우선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요소가 많지만 그만큼 감각적으로 강력하고 자극적인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힘든 인생 속에서 가끔은 고삐 풀리도록 ‘빡세게’ 놀 줄 아는 것도 기술이고 우리들의 정신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유럽 젊은이들이 한국 여행 다녀와서는 ‘You guys can party!’라고 소감을 이야기하는 것도 종종 본다. 한국 사람들 놀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큼 고단하기는 하다. 하루 종일 일한 데 더해 밤까지 내 몸의 오감을 강하게 자극하고 술과 야식을 먹는 탓에 내 몸의 내장에도 쉴 틈을 주지 않으며, 그렇게 강하게 즐긴 다음날엔 잠이 부족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나가는 삶. 이런 삶은 아직 몸이 버텨주는 한은 좋은데 우리는 아이언맨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노는 것도 좋고, 치맥도 좋고 족발에 소주도 좋지만 몸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 수록 느낀다. 우리 한국사람들, K-beauty로 외모는 잘 가꾸고 있으니 이제 몸속 건강도 좀 챙기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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