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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21. 2019

4. 합격, 하버드

딩, 딩, 딩, 그리고 상쾌한 아침

사람마다 자기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 인생은 고등학교 이후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계획한 대로 풀린 적이 별로 없었다.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내가 무언가를 열렬히 원하고 계획해서 그것을 이루어낸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 원하던 동아리 오디션에 합격한 일, 그리고…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내가 그 시간 동안 항상 불행했다는 말은 아니다. 계획했던 차선책을 선택하거나, 때로는 계획에 없던 기회들을 타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름 재미있고, 의미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인생이 어차피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열심히 도전하되 그저 삶이 나를 데려가는 대로 재미있게 살자라는 인생철학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내가 원하고 계획했던 대로 일이 그대로 풀려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하버드에 합격한 일이다.


그 일의 의미 있는 시작점은 아마도 입학 설명회였던 것 같다. GMAT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무렵, 마음에 두고 있던 하버드 행정대학원(HKS)의 입학설명회가 상해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캘린더에 부킹을 해 놓고 기다렸다. 행사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 장소인 루자쭈이의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같은 층에 가는 듯한 중국 신사분이 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동문인가요? 몇 년도 졸업이죠?” 나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허허 동문이 되면 좋겠네요 그러면서 이 학교 지원자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가 뭔지 모를 어색한 눈빛을 보냈다. 


행사장에 도착하고 나서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HKS의 상해 방문은 총 이틀 일정으로 첫째 날은 prospective students를 위한 입학 설명회, 둘째 날은 동문의 밤이었는데 내가 날짜를 착각해서 둘째 날에 온 것이다. 어쩌다 그랬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는 바보 같은 실수였는데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마침 어드미션 디렉터가 나와 있었는데 그는 자기 일을 어제 다 끝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동문들조차 그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행사 시간 내내 그의 이야기를 열렬히 들어줄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그 전날 제때 왔다면 운이 좋아야 그에게 질문 한두 개 정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부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날 따라 대화도 술술 잘 풀렸고 그 와중에 내 PR도 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HKS가 그 해에 한국으로는 입학 설명회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 지원자 중에서 그가 나를 기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날의 일이 내가 최종 합격하는 데 어떤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이너스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이 학교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나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어드미션 오피스와도 지속적으로 연락했다 (디렉터에게 follow-up question을 하거나, 질문을 빙자해 내가 얼마나 이 학교에 관심이 있는지를 어필하는 등). 어드미션 블로그도 샅샅이 훑었다. 에세이에도 좀 더 체계적으로 공을 들였다. 꼭 언급해야 할 내용들을 bulletpoint로 나열한 후 에세이 본문에 그 내용들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어떻게든 들어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 프로그램 말고도 MBA 과정도 몇 개 지원했지만 이만큼의 정성을 들이지는 못했다 (설명회를 찾아가거나, 어드미션 오피스와 연락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각 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에세이를 쓰는 일은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내가 정말 무엇을 하려 하는지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지원하는 학교의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개 정도의 에세이를 써야 했는데, 그 세 편의 글에 에세이 질문에 대한 사려 깊은 나만의 답은 물론 왜 그들이 나를 뽑아야 하는지, 나는 왜 이 학교와 fit이 맞는지, 내가 이 학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진심인지 등을 모두 녹여내야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학교에 복수 지원을 하는데 (나도 HKS를 포함, 5개 학교에 지원했다), 지원하는 모든 학교에 대해 이렇게 정성을 들이기에는 시간과 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무언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할 때 (그 대상이 특정 학교의 프로그램이든, 특정 스포츠 팀이든, 특정 아티스트이든 간에) 평소부터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그 대상을 오랫동안 follow 해 온 사람이 쓰는 글과 며칠 동안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서 속성으로 공부한 사람의 글은 깊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학 결정을 다소 급하게 했던 나는 이런 점이 특히 어려웠다. 게다가 시험은 주어진 시간이 오면 답안 작성을 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결과가 바로 내 손을 떠나기 때문에 개운하기라도 하지만 에세이는 작성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원 마지막 날 까지도 이 내용이 맞을까 이 부분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아 개인적으로는 유학 준비 중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 


지원한 MBA스쿨들의 1차 라운드 결과가 나올 즈음부터는 유학생 게시판을 들락거리는 것이 하루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첫 학교의 결과는 Ding(탈락)이었다. 이때까지도 나의 멘탈은 괜찮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번 더, 대기 명단(waitlist) 같은 것도 없이 신속하게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게 되자 나는 극도로 우울해졌다. 어차피 남은 학교들도 결과가 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 나이에 이 경력인 나를 받아 주지 않는구나, 내 인생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내년에 한 번 더 도전해 본다면 미친 생각일까 라는 고민도 했다. 여기서 그만 두면 30대 중반이라는, 인생의 기로가 될 소중한 순간에 유학 준비를 하느라 완벽한 시간/에너지 낭비를 한 것이 되는데 그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한 살 더 먹고 유학을 가면 졸업하면 40에 가까워질 텐데 그건 더 철없는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명확한 답이 있는 물음은 아니었다. 술을 좀 마시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는 모든 결과 발표 이후에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습관처럼 스마트폰 알림을 확인하는데 마치 스팸 메일 같은 제목으로 ‘Congratulations!’라는 메일이 와 있었다. 잠이 덜 깬 나는 한쪽 눈만 떠서 메일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합격했다는 내용 같았다. 전화기를 세면대에 놓고 세수를 한 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내용이 맞는 것 같았다. 동영상 링크가 있어 클릭했더니 휘파람 소리의 배경 음악과 함께 학교 총장과 어드미션 디렉터의 얼굴이 나왔다. 미소를 만면에 띠고 Welcome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좀 실감이 났다. 그날 하루 동안 그 동영상을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출근길에, 회사에서, 그리고 퇴근해서 계속 봤다. 동영상의 대사를 전부 다 외울 정도로 지겹도록, 아니 사실 지겹지 않아서 계속 봤다. 볼 때마다 마치 추운 겨울에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실 때 몸으로 쫙 퍼지는 기분 좋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기분이 떠올라 몇 년 만에 이메일을 뒤져 다시 동영상을 봤는데, 확실히 그때의 기분은 안 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역시 지나고 나면 무뎌지게 마련인가 보다)


합격 통보는 봄이었고 출국은 8월 중순이니 5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다. 이때의 나는, 말하자면 누가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해도 허허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특히 회사에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퇴사 소식을 알리기 전에, 가끔 남몰래 (사실 들켜도 상관없으니 좀 더 여유 있게) 하버드의 인트라넷에 접속하거나 구글 어스로 학교 주변을 살펴보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꿈꾸다 보면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좋다는 말처럼, 앞으로 2년 동안 좋은 시간이 펼쳐지고 나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걱정 같은 것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그때는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생길 공포감과 졸업 후 실제로 다가올 현실의 벽을 알지 못했다. 물론 내가 100군데 이상의 지원서를 쓰고 잡 인터뷰에서 10번 이상 물을 먹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한 달에 의료보험료를 160만 원씩이나 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릴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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