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 채용이라는 블랙박스, 제가 열 번 열어 보았습니다.
대학원 유학 과정을 거치며 job application을 100번 넣는 경우가 엄청나게 드물지는 않다. 밖에서 보기에는 나름 훌륭한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취업도 잘 될 것 같지만 안에서는 이렇게 수많은 지원과 좌절을 거치며 자기 자리를 힘들게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국제기구로 한정하여 면접을 열 번 본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면접이 들어오지도 않거니와 열 번이나 면접을 보기 이전에 합격하는 것이 정상이다. 국제기구에 계약직 컨설턴트로 들어와 자리 잡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일하기 시작한 부서 또는 그 이후 한번 옮긴 부서에서 열심히 일하다 좋은 상사 만나고 운대가 맞아 그 팀에서 자리가 나면 한두 번 안에 채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처럼 이곳저곳 다른 팀에서 면접을 많이 보고 지속적으로 탈락하는 케이스는 분명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내가 면접이 많이 들어온 이유는 내 과거 경력이 조금 다양(또는 난잡)한 관계로 여기저기 갖다 붙이기에 용이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본 면접에서 내가 줄줄이 떨어진 이유는,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한데, 명확한 한두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매우 다양하고 그때그때 달랐다. 국제기구의 채용 절차는 밖에서 보기에는 블랙박스와 같기 때문에 지원자는 계속 마음고생을 하다가 탈락이 확정되면 스스로를 과도하게 자책하거나 (‘내 면접에 뭔가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는 (‘어차피 뽑을 사람 다 정해놓고 하는 쇼였어!’) 길로 가는 경우가 많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0번의 경험 이후 돌아보면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을 확률이 높고 그때그때의 변수가 다르기 때문에 절대 단순화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국제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내 경험을 하나씩 살펴본다면 이 곳에서의 채용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을 잡고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기 이전에, 국제기구 채용 전반에 있어 하나 알아두면 좋은 것은, HR 담당자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HR 담당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지원서들 중 Long list를 뽑아 팀에 전달하는 것 정도이다. Short list부터 인터뷰, 최종 결정 등 모든 중요한 것은 다 해당 팀에서 결정하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결정을 사실상 독점하는 사람은 그 팀의 매니저이다 (YP Program은 예외).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좋은 구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니저에게 업무적 관리감독 권한 이외에 인사 권한까지 주어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보기에 객관적으로 훌륭한 후보라도 매니저의 눈에 들지 못하면 뽑힐 수 없다. 반대로 매니저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 뽑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1. Washington DC - 민간투자 부문 YP Program (석사 졸업생 및 경력직 공채)
모든 지나간 기회 중에 가장 아까운 기회였다. 이 자리는 특히 경쟁이 치열해서 서류를 통과해서 면접까지 가는 것 자체가 가장 어려운데 지인들의 고마운 도움으로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면접을 망쳐 탈락했다. 지금의 내가 이 때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인터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면 나는 이후 2년 8개월간의 계약직 생활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일단 회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렇게 회사 분위기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인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인답시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일단 물어보는 핵심에 대해 간결하고 사려 깊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보여 점수를 깎아먹었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를 하거나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내가 회사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다 드러낸 격이었다. 용어 사용이라던가 과거 경험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면접관들에게 낯설지 않은, 뭔가 ‘우리 사람' 같은 느낌을 주어야 기본적으로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그 정 반대로 달려간 셈이었다 (이 프로그램 탈락 이후 나는 면접 연습에 공을 많이 들였고,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도 했다)
#2. Manila - 아시아 지역 개발은행 민간투자 부문 포트폴리오 매니저
아시아 지역의 개발은행에서 총 5개월에 걸쳐 3차 면접까지 진행했다. 채용하는 팀에서야 항상 그렇듯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첫 면접 이후부터 너무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험이 늘어갈수록, 면접이 들어와도 무덤덤하게 지내는 것이 학습되었다). 3차까지 진행되고 나서 설레발을 치며 그 나라에서 사는 것은 어떠한지 검색까지 했지만 결국 최종 연락은 오지 않았다. 먼 곳이고 지인이 없다 보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3차까지 면접 분위기를 봤을 때 내정자를 정해놓고 내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나보다 더 훌륭한 지원자가 있었거나, 아니면 조직 내의 어떠한 이유로 포지션이 취소 또는 무기한 연장 (지원자 입장에서는 펄쩍 뛸 만한, 황당한 경우지만 국제기구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다) 되며 흐지부지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3. Beijing - 민간투자 부문 투자전문가
그룹 내 민간투자 부문의 북경 오피스에 한국, 중국, 몽골 등을 커버하는 포지션이었다. 중국 경험이 있는 한국인으로서 나에게 좋은 찬스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는데, 사실 이 팀은 중요한 투자 파트너인 한국 기관들(산업은행, 수출입은행)과 상대하기 위해 해당 기관에서 일을 오래 했고 네트워크가 있는 인물을 데려오고자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목적에 나보다 더욱 부합하는 지원자를 채용하였다.
#4. Singapore - 공공부문 PPP (Public-Private Partnership) 전문가
면접 분위기는 좋았었는데 마지막에 매니저가 기대감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는지 살짝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탈락 통보를 받은 이후 개인적으로 확인해 본 결과 면접 패널 3명 중 (보통은 최소 3명이고 많으면 6명까지도 본 적이 있다) 매니저를 제외한 2명은 나에게 최고점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조차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다소 놀랐다고 했는데 최종 선발된 사람은 최초 이력서 shortlist에는 있지도 않은 인물이었다고 했다. 내막은 아마도 이러했다 - 매니저(프랑스인)가 자신의 지인(프랑스인)이 이 포지션에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여 지원을 종용했고, 팀원들이 채용 절차를 진행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를 데려오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공개경쟁 채용을 해야 하니 팀원들에게는 채용 절차를 진행하여 면접자를 추리라고는 했지만 애초에 다른 지원자들은 어떤 구실을 잡아서라도 떨어뜨리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당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명목상으로는 절차를 어긴 것도 아니고 매니저가 자기 선택에 대해 자신만의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 끝이다. 결국 나만 시간, 에너지 낭비를 한 셈이었지만 억울해하기보다는 끝까지 좋은 매너를 보여야 면접관들에게 동정표를 받으며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 Washington DC - 공공부문 Carbon Finance 전문가
여름 인턴 경험과 당시 에너지 부서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던 경험을 인정받아 최종 면접을 보게 되었고,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 면접 이후 한 달간 아직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다며 애간장을 태우더니 결국 탈락 통보가 왔다. 채용된 사람은 이미 정규직 Staff으로서 현재 그룹 내 민간투자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이 팀과 계속 일을 같이 해 오다가 이번에 아예 이 팀으로 옮기려고 지원한 것이었다 (국제기구에서는 이런 lateral move도 종종 일어난다). 내정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런 사람과 경쟁해서 뽑히기는 애초에 어려운 게임이었다. 이럴 거였으면 이야기를 빨리 해주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팀에서는 1 지망 지원자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른 지원자들도 이런 식으로 붙들고 있어야 한다.
#6. Washington DC - 민간투자부문 재무팀
지원서 데드라인이 끝나기도 전에 실무자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가 CV스크리닝을 하는데 나를 미리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미니 면접에서 실무자는 나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며 (나의 이전 경력이 자신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인터뷰 패널에 나를 우선적으로 추천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니 나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이 팀의 업무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며 패널 인터뷰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국 패널 인터뷰에 초대되지 못했다. 실무자는 나를 적극 추천했지만 매니저는 그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여기서 모든 것은 매니저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7. Washington DC - 민간투자부문 Fintech 투자전문가
Fintech가 한창 핫하던 차에 그룹 내 민간투자 조직에 Fintech 팀이 신설되었다. 중국에서 투자 일을 할 때 Fintech관련 기업을 방문 및 투자 검토한 일이 있었던 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끼워 맞추어 지원했다. 욕심이 나서 적극적으로 팀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등 노력을 많이 했다. 면접 공부를 따로 많이 해서 들어갔고 매니저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기대감은 커져갔고, 최종 2인에 들었다는 소식까지 들었지만 결국 또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채용된 사람은 fintech 스타트업에 핵심 멤버로 몸담은 경력이 있는 분으로, 겉핥기 경력에 가까웠던 나에 비하면 당연히 더 유력한 후보였다. 결국 채용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더 유력한 지원자가 있으면 내가 아무리 면접 준비와 execution을 잘해도 뽑힐 수가 없다. 당연히도 지원자 풀에 누가 있는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8. Washington DC - 민간투자부문 Agribusiness
이것 역시 중국에서 투자 일 할 때 Agribusiness 회사를 잠깐 봤던 것을 가지고 지원해서 운 좋게 면접까지 갔다. 다만 인더스트리 전문가의 몇 가지 질문에 나의 얇게 바른 지식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최종 선발된 지원자는 역시 이 조직 내의 country office에서 해당 업무를 해 오던 정규직 staff으로서 이번 기회에 워싱턴으로 포지션을 옮기려고 시도하는 사람이었다 (country office 소속 직원은 대부분 ‘Local contract’ 하에 있어서 급여도 현지 통화로 받고 복지 수준도 조금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이들 중 많은 수가 워싱턴 본부의 ‘International contract’ 자리로 옮겨 커리어를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애초에 내가 되기는 힘든 게임이었다.
#9. Singapore - 민간투자부문 자산운용
실무자급에서 나를 호출하여 미니 면접을 봤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실무자급 단계였기 때문에 딱히 기대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실무자급에서 정리되었다. 나와의 면접은 좋았지만 이 포지션에 더 맞아 보이는 지원자들이 있어서 나를 최종 면접 후보로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10. Washington DC - 공공부문 재무팀
처음에는 팀에 대해 잘 몰랐고 내게 맞는 포지션인지 확신이 없었다. 지원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기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4개월 만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3시간짜리 모델링/프레젠테이션 테스트를 하겠다고 했다 (이런 식의 테스트는 YP Program 이후 처음이었다). 귀찮기도 하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몇 시간 준비해 들어갔는데 결국은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패널 면접 분위기도 좋았고, 그래서 내심 기대하던 차에 일정에 없던 추가 1:1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최종 점검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내가 일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고 그 이후 2-3주간 연락이 없었다. 애간장이 타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매니저로부터 오퍼 하겠다는 전화를 받았고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지원-면접-좌절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포지션의 경우 내정자도 없었고, 누가 봐도 뽑지 않을 수 없는 막강한 지원자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내가 테스트와 면접을 잘 수행했다는 3박자가 잘 맞아 들어간 케이스였다. 들어오고 나서 채용과정에서 궁금했던 것을 몇 가지 물어봤다. 지원한 지 4개월 만에 첫 연락이 왔던 것은 그저 이 팀이 당시에 업무가 바빠서 면접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최종 면접 이후 연락이 늦어진 것은 디렉터가 바빠서 최종 승인받을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런 것이었다. 나는 반대편에서 혼자 별 생각을 다 하며 다양한 해석을 하곤 했는데, 이런 단순한 이유들이었다니 좀 허무했다.
하버드 입학과 국제기구 입사 중 어느 것이 더 힘들었나
나에게 하버드 입학과 국제기구 정규직 입사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웠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다. 학교는 운 좋게 한 번에 합격했지만 국제기구는 열 차례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나서 쓰러져 토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들어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 풀리지 않는 미로에서 지도도 없이, 기약도 없이 헤매는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물론 사람들마다 경험은 다를 것이다. 내 주변에는 평온한 직장생활 중에 국제기구에 딱 한번 지원해서 들어오신 분들도 있고 컨설턴트 생활을 하다가 금방 매니저의 눈에 들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정규직 포지션에 바로 뽑힌 경우도 있다. 기본적인 업무능력에 더해, 뛰어난 대인 지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국제기구에서 자리 잡는 것이 그리 어려운 퍼즐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의 스타일을 빨리 파악하여 그에 맞추고, 조직 내 분위기를 잘 읽고, 남들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하여 줄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개발되지 않았던 나는 그저 올라오는 잡 포스팅을 보며 지원과 좌절을 반복하는 방법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 속에서 내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고 스킬 개발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 나도 일하는 팀에서 적극적인 네트워킹과 reputation을 이용해 내부자로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귀중한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