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장 다닌 FCV 4개국에서의 업무와 단상
Burundi (부룬디)
1. 최빈국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부룬디는 정말 최빈국이다. One of them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1인당 GDP로는 뒤에서 1등, 가끔 2등 정도 하는 국가이다. 출장 가기 전에 아는 후배로부터 ‘부룬디는 정말 장난 아니라던데요'라는 말을 듣고 과연 진짜 어떤지 궁금해졌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라는 곳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실제 도착한 부룬디의 수도 Bujumbura는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일단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많이 시골 같았다. 우리 회사의 country office는 주로 그 나라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회사의 창밖으로 원숭이가 다니는 것이 보일 정도로 시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DRC의 Kinshasa같이 아직 저개발이면서 도시화의 심화로 인해 인구와 차량 밀도가 높고 정신없는 상황에 비해서는 훨씬 조용하고 (최소한 지금은) 안정된 곳으로 보였다. 경제적으로 최빈국이라고 해서 무의식 중에 가난, 무질서와 혼란의 정점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던 나 스스로가 약간 민망해졌다.
이런 광경을 보니 좀 상투적이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우리는 이 나라 경제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와 있지만 경제 개발이 과연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일까? 평화로운 시골 같은 이곳에 도로 깔고 전선 잇고 공장 짓기 시작하면 곧 사람들과 차가 몰리고, 공기 탁해지고, 쓰레기가 넘쳐나는 공간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사람들의 삶의 질은 더 나빠질 것 같은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이들에게 그런 길을 가라고 조언을 하고 돈을 빌려주는 것일까? 물론 문제는 간단하지 않고 감상적으로 접근할 일도 아니다. 혼자 경제발전을 하지 않는다고 외부와 단절하여 시골 같은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시골이라 평화롭고 좋다는 건 며칠 왔다 가는 외국인의 관점이고, 이곳 주민들은 빨리 경제 개발해서 ‘잘 살아 보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별다른 고민 없이 경제 개발이라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무엇이 ‘Sustainable Development’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예약해 놓은 부룬디의 호텔에 도착했는데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조명은 약간 침침한 편이고, 1층 로비는 딱히 고급스럽지는 않은 대리석 같은 소재로 되어 있으며 어항이 놓여 있는 것이… 그렇다. 중국에서 많이 보던 3성급 호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가 중국제인 것을 보니 아마도 중국인이 주인이거나 건축한 호텔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호텔 근처에도 중국 식당이 있었고 점심을 먹으러 간 샌드위치 카페에도 젊은 중국인들이 눈에 띄었다. DRC에서도 중국인들을 꽤 봤지만, 부룬디같이 경제규모가 작은 최빈국에까지 진출해 있다니 정말 중국이 아프리카 전체를 접수하려고 마음먹기는 한 것 같았다. 추가로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에티오피아 항공을 타고 Addis Ababa에서 경유를 했는데 그곳 공항에도 중국 식당들이 많았다. 심지어 중국 결제수단인 즈푸바오를 받고 홍샤오 우육면 같은 음식을 파는 곳도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외국 공항에서 육개장 칼국수를 파는 느낌). 그만큼 사업상 에티오피아에 드나드는 중국인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대아프리카 전략은 국가 주도적인 것으로 신제국주의 의도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저금리를 내세워 사업성이 부족한 자원개발 사업 등에 대형 차관을 제공한 다음, 상환하지 못할 경우 현지 광산 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여 자원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국가들도 조금씩 경계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도 있는데, 10년 후에 어떤 상황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3. 부룬디는 나라 자체의 크기와 인구도 작은 편이고 국가 전체의 전력설비 용량도 50-60MW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비교하기 힘들 만큼 작은 규모였다 (비교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한국은 인구는 부룬디의 5 배지만 전력설비 용량은 100,000MW 이상이니 부룬디의 1인당 전력설비는 한국의 1/400인 셈이다). 나는 DRC, 부룬디, 르완다 3개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 강의 수력 발전 프로젝트 일을 하고 있었는데 3개국의 전력회사 모두를 같은 모델로 분석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부룬디 전력회사의 전력공급/재무분석 모델을 만들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부룬디에 왔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3개국의 협조를 얻으며 공동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야심 찬 계획이다. 단일 국가 프로젝트도 정부와 협업하고,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진행시키며 회사의 보드진에게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3개국과 협조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많은 난관이 예상되는 험한 길이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내가 에너지 팀을 뜨고 나서 엎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함께 미션에 갔던 팀 내 다른 TTL이 진행하던 부룬디 태양광 발전 사업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쪼록 태양광 발전 사업이라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그것이 부룬디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한다.
4. 국영 전기회사 고위직을 만나 우리의 계획을 설명하고 자료 협조를 구하기 위해 갔다. 하지만 일이 꼬였다. 우리가 요청한 자료(기본적인 것들이다 - 해당 전력회사의 최근 3년간 재무제표, 내부 회계장부 등)를 공유하는 데 비협조적이었던 것이다. 담당자가 처음에는 여유 있게 웃으며 다 협조할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중간에 자기 상사(전력회사의 부회장)가 들어와서 몇 마디 하고 나가는 것을 보더니 태도를 180도 바꿔서 말을 빙빙 돌렸다. 난감했다. 보통은 이렇게 방문했을 때 적극적으로 자료를 요청해야 하고, 그 사무실에 계속 죽치고 앉아서 자료를 받아내야 한다. 마치 회계감사인이 해당 회사에 사무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계속 자료를 요청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쪽 현지 오피스 담당자가 국영 전기회사 윗분과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한 후 그 윗분께서 아래 직원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라고 지시를 하달해야 하는데, 우리 쪽 담당자가 사전 작업을 제대로 해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문했을 때 원하는 자료를 얻지 못하면 결국 십중팔구는 돌아가서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대로 미션의 중요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갈 위기에 처했는데 다행히 우리보다 먼저 와서 일하던 유럽계 재단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구해 공유를 해 주는 바람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전력회사 부회장이 왜 우리에게는 자료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내막은 내 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 추측을 하자면, 우리가 재무자료를 보고 나서 ‘회사가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식의 진단을 할 경우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5. 현금을 사용하기 위해 호텔에 비치된 국제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할까 했다. 그랬더니 운전기사가 자기가 바꿔다 주겠다고 해서 달러화를 건넸다. 그랬더니 잠시 후 부룬디 현지 화폐 한 뭉치를 고무줄로 묶어 가져다주었다. 내막은 이렇다. 부룬디 정부에서 자국 화폐가치가 너무 낮아지지 않게 환율 관리를 하는 바람에 부룬디 프랑(BIF)-달러(USD)의 공식환율(은행, ATM, 신용카드 결제 시 적용되는 환율)은 낮은 편이지만 길거리의 외환 암시장에서는 화폐들의 실제 가치가 반영되어 공식환율에 비해 훨씬 높은 환율로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과거 한국에도 있던 ‘달러 아줌마'들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은행에서 환전을 하지 않고 암시장에 나와 달러화를 팔면 은행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룬디 돈을 받게 된다. 나 같은 출장자들의 경우 숙박비를 내가 먼저 계산하고 나중에 회사에서 reimburse를 받는 시스템을 따르고 있는데, 만약 숙박비 지급을 카드로 하지 않고 현지 암시장에서 바꾼 현지화폐로 한다면 (reimburse는 어차피 공식적인 환율에 따라 지급받게 되기 때문에) 출장을 통해 환차익을 남겨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부룬디에 다시 오지 못했고 이런 소소한 꿀팁을 써먹을 기회는 없었다.
PNG (파푸아 뉴기니)
1. Papua New Guinea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평화로운 휴양지의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사실 PNG는 EAP(East Asia and Pacific) 지역에서 가장 저개발국이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 중 하나다. 아프리카 팀과 주로 일하던 내가 비행 일정만 30시간이 걸리는 이 곳까지 오게 된 사정은 이렇다. PNG의 프로젝트 스케줄은 원래 6개월 이상 여유가 있는 편이었는데 EAP 본부의 디렉터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갑자기 한 달 반 줄 테니 이 나라의 전력 발전 계획과 전력 회사 재무 모델을 짜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매니저 이하 팀원들이 조직 내부 인력 중에서 이런 일을 빨리 할 수 있는 사람을 급하게 찾던 중 나의 상사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좀 급하게 가게 되었는데 워싱턴에서 PNG의 수도 Port Moresby까지 가는 길은 정말 멀었다. 도착해서 본 PNG의 첫인상은, 직전 출장지가 부룬디여서 그런지 몰라도 그보다는 훨씬 발전된 국가라는 느낌이었다. 부룬디가 한국의 60년대 또는 50년대 느낌이라면 PNG는 80년대 정도는 되어 보였다. APEC 유치를 준비하느라 해안가에 멋진 건물을 짓고 있는 등 경제 개발을 향한 열망과 에너지가 어느 정도 느껴지는 곳이었다.
2.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주요 언어 중 하나는 Pisin이었다. 이 말은 아이티에서 쓰는 French Creole과 같이, 한 마디로 현지 언어와 영어가 반반 정도 섞인 정체불명의 Broken English다. 내가 불어는 못하기 때문에 아이티에서 French Creole을 들어도 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영어를 알아듣는 입장에서 Pisin말로 나오는 라디오를 듣고 있노라니 느낌이 정말 새로웠다. 반 정도는 영어라 좀 알아듣겠다가도 나머지 절반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이걸 계속 들을 수도, 그렇다고 무시하고 안 들을 수도 없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아이티나 이곳이나, 원래 갖고 있던 언어가 유럽인들의 언어에 의해 상당 부분 침식당했다는 측면에서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현대의 한국어도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인데, 과거 중국의 영향력이 크던 시기에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고유언어가 침식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3. 수도 Port Moresby의 길거리는 나는 마치 피가 흩뿌려진 듯 붉은 액체로 물들어 있는 곳이 꽤 눈에 띄었다. 피 색깔보다는 다소 옅은 것이 진짜 핏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길바닥 곳곳에 붉은 물을 들인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 답은 여러 상인들이 길에 널어놓고 팔고 있던 비틀 넛 (Betel Nut)이라는 열매였다. 이 열매를 입게 넣고 씹다가 겨자씨 식물을 라임 파우더에 찍어 같이 입에 넣고 씹으면 (대체 이런 사용 방식을 누가 처음 찾아서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다) 약간의 각성 또는 흥분 작용을 줌과 동시에 입 안에 붉은색 물이 든다. 커피 또는 담배와 같은 기호품으로서 중독성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 곳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상용하고 있었다. 길거리의 붉은 액체 자국은 사람들이 비틀 넛을 씹다가 길에 함부로 뱉어 내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비틀 넛은 대만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있다고는 하는데 이곳처럼 광범위하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출장과 마찬가지로 전력 회사의 담당자와 그의 팀원들을 만나러 방문했다. 회사 건물에 ‘비틀 넛 씹기 금지'라는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공공장소에서는 마치 흡연을 금지하듯 비틀 넛 씹는 행위를 규제하는 캠페인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팀원들을 먼저 만나 이야기하던 중 이윽고 큰 덩치의 담당자가 대장 포스를 풍기며 등장했다. 우리에게 이야기하려고 입을 연 순간, 이 사람 치아가 아주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팀장이어서 캠페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을까. 방금 전까지 비틀 넛을 씹다 온 것이 분명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핏빛 이빨을 내보이며 이야기하는 덩치 큰 팀장의 이미지는 매우 그로테스크해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4. PNG는 분명 흥미로운 나라였지만 내 생각이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당시 나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PNG에 가기 직전, 나는 우리 회사의 재무팀 정규직에 지원하여 최종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전에도 숱하게 정규직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많이 무뎌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결과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시차 때문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밤 11시쯤 워싱턴에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면접을 본 팀의 매니저였다. 축하한다며 나에게 오퍼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2년 8개월간의 계약직 생활은 파푸아 뉴기니에서 끝났고 나는 그날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