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희 Mar 19. 2019

#. 유학의 ROI - 나의 도전은 옳았을까

퇴사 후 유학 도전. 5년 이후 돌아보는 투자비용과 수확

나는 3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좁게는 커리어, 넓게는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고자 다니던 직장을 떠나 유학에 도전했다. 퇴사 이후 2년 유학생활을 포함해 총 4년 9개월이 걸려서 워싱턴 DC에 위치한 국제기구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선택은 불확실성(=위험)이 많은 결정이었고 실제로 지난 5년간 숱한 위험이 실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뒤를 돌아볼 여유가 조금은 생긴 현재 상황에서 5년 전에 내린 유학 도전이라는 결정이 초래한 투자비용, 그리고 그로 인한 수확/이익은 어떠한지 정산을 한 번 해 보고 싶어 졌다.


먼저, 비용은 꽤 컸다. 유학 비용은, 등록금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년간의 등록금과 알뜰하게 쓴 생활비(1인 기준)를 합쳐 총 2억 원 정도가 들었다. 내가 당시까지 모아놓은 전 재산은 물론 그때까지 쌓인 퇴직금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나는 혹시 가능할까 싶어 국비 장학금을 받기 위해 국사 시험까지 봤고, 학교 안에서도 기회를 찾아봤지만 결국 어떠한 장학금도 받지 못했다. 즉, 저 돈을 모두 생으로 내 통장에서 지급해야 했다 (동기들 중에서도 미리미리 유학 준비를 야무지게 잘 한 친구들은 장학금을 받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유학을 오는 케이스도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나는 그 중간 어딘가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회사 지원을 받아 온 친구들은 유학을 통한 커리어/인생 방향 전환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경우와 비교하기는 힘들다). 물론 실제 든 비용이 전부가 아니다. 기회비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을 가지 않고 한국/중국에서 계속 일을 했다면 확실히 돈을 더 모을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대출을 끼고 강남이나 푸동에 아파트를 사서 부동산 가격 상승의 수혜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유학으로 인한 투입비용은 적지 않았다.


유학으로 얻은 이익은 무엇일까. 연봉 상승? 동종업계라면 물론 미국이 한국보다 급여가 높은 편이지만 대신 생활비도 그만큼 많이 든다. 게다가 나는 동종업계로 옮긴 것이 아니고 계약직 기간이 있어서 비교하기가 다소 애매하다 (다만 장기적인 ‘항상 소득'을 고려한다면 국제기구는 패키지가 나쁘지 않은 데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괜찮은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네트워크? 유학을 온 학교의 네트워크는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분명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기적 항상 소득이니 네트워크니 하는 것은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않았거나 다소 추상적인 것들이다. 유학으로 인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지금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고, 내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은 바로 나 자신의 성장, 시야의 확장, 그리고 인생의 방향 전환이다.


유학 기간 중 나는 comfort zone을 벗어나 새롭고 불편한 상황에서 주로 생활했고,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각 이상으로 많이 성장했다. 가장 기초적으로는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배우고 쌓은 지식이 내 인생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 나의 경우, Infrastructure Finance, PEF같이 특정 업계로 타게팅된 몇몇 수업은 내 커리어에 실제로 필요한 기술적인 지식 및 훈련 기회를 제공했고, 그 덕분에 국제기구나 연금펀드 같은 회사에 기회의 문이 살짝 열렸을 때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수준에 적응하고 따라가며, 그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신감이라는 소중한 수확을 얻었다. 처음 유학을 왔을 때에는 영어로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씩이나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처음이어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영어 텍스트도 익숙하기는 했지만 상당한 양의 대학원 수업 과제를 제한된 시간 내에 지속적으로 읽어대고 또 써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놀자고 모인 파티도 힘들었으니 말 다했다. 그러던 내가 3학기째에는 수업조교를 맡게 되었고 마지막 학기에는 그에 더해 주말에 리뷰 수업까지 진행하며 학우들을 가르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훈련소 신입이 군생활 끝무렵에는 여유 있는 말년 병장이 되는 것처럼, 유학 끝무렵에는 학교생활이 제법 편안해졌다. ‘나는 이 레벨에서도 괜찮게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도 통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2년간 얻은 나는, 그 2년을 보내기 전 막연하게 ‘나도 유학 가면 아마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혼자 생각하던 나와는 내가 봐도 남들이 봐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격지심 같은 것도 없어졌다. 유학을 오기 전 유학생 출신들을 보면 내가 모르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 때문에 혼자 위축되는 듯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더 이상 가질 이유가 없어졌다. 스스로 위축되지 않으면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는 나 자신과 남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시야의 확장은 유학의 준비 과정과 실제 유학 생활, 졸업 이후의 삶까지 전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최초에 유학을 생각하게 된 배경인 ‘유학을 다녀오면 한국에서 나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시각은 곧 ‘할 수만 있다면, 한국을 떠나 근무조건도 좋고 만족감이 높은 곳에 정착하여 일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유학은 내가 실제로 ‘글로벌 인재’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경력을 한국에서 보낸 한국사람으로서 나를 찾아줄 곳은 (해외 오피스라고 해도) 한국 조직뿐이었다. 이제는 모양 좋은 미국 학위, 그리고 그로 인해 가능했던 미국 회사 및 국제기구에서의 경험을 더한 나는 한국 조직 이외의 글로벌 조직에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이젠 오히려 전형적인 한국 조직에서는 다시 일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는지도).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된 이후로는 습관적으로 업무를 삶보다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 ‘내가 저녁에 또는 주말에 일을 보지 않거나 휴가를 너무 오래 가면 회사 일이 과연 제대로 진행이 될까' - 에서 삶과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고방식 - ‘내가 휴가를 써도 회사 일은 어떻게든 진행이 되며, 그런 시스템을 갖추어 내 여가 시간을 확실히 확보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이곳에 와서 나의 직장 동료와 상사들이 모두 그렇게 삶을 중시하며 살고 있는데 딱히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시스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한 방대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거나 압박을 받으며 살다가 외국에 와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적은 곳에서 살다 보니 좀 더 나 자신을 온전히 돌아보고 중요한 것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인생의 방향 전환은, 30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유학이 아니면 쉽게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도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방향으로 갈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벌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누구도 왜 2년간 경력이 비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유학을 통해 나는 민간 금융투자 업계의 자산운용사에서 살아가던 인생을 공공 국제개발 업계의 국제기구에서 사는 인생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바람직한 전환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만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유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유학의 ROI는 꽤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었다. 미래를 알 수 없었던 5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일단 내가 목표하는 수준의 학교에서 나를 받아줄지부터가 불확실했다. 운 좋게 합격의 기쁨을 누렸더라도 졸업 후 좋은 곳에서 취업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인생 방향 전환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국제기구 계약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다거나, 최초에 민간기업에서 기회를 잡아 그쪽으로 올인했다가 H1 비자를 받지 못해 취업 미아가 되었다던가, 아니면 애초에 아무 곳에서도 인연이 닿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취업을 알아봐야 했다던가 하는 일들이 모두 충분히 가능했다. 결국에 어떻게든 좋은 기회를 만났거나 적당한 곳에 취업이라도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객관적으로 유학의 ROI가 좋았다는 말은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 처했어도 유학 도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답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 보니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 내가 만약 도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분명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나의 그러한 갈증을 속시원히 해결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유학 생각을 한 번 접었다가 결국 나이를 더 먹고 나서 유학 온 나의 전력을 고려해볼 때 이번에 유학을 포기했더라도 세월이 지난 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Executive program이라도 찾아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 인생의 방향 전환 같은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좀 더 일찍 유학 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부 시절에 교환학생이라도 한번 다녀와서 견문을 넓혔으면 내 20대를 조금 다르게 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유학을 완전히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아마도 평생 ‘나는 유학 갔으면 잘했을 것 같은데'를 되뇌며 머릿속 한편에 아쉬움과 후회를 간직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자식들에게 내 욕구를 투영하려고 했을지도?)


결국 나에게 이 도전은 시기와 조건의 문제였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나는 보통 ‘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위험 인식과 위험 회피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어떤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결국은 고민을 하는 당사자가 과연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리고 스스로를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 정답은 다를 것이다.

이전 24화 24. 100번의 지원과 10번의 인터뷰, 그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