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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18. 2020

진정한 꽌시의 나라... 미국?

일상이 네트워킹의 연속인 나라에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

인적 네트워크가 사는 데 매우 중요한 나라, 인맥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만연한 것으로 유명한 나라는 중국이 있다. 모두가 들어서 알고 있는 ‘꽌시'의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내가 중국에 3년 남짓 살아본 경험으로는 중국은 ‘꽌시'의 나라가 맞다. 하지만 이러한 꽌시는 주로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다. 사업상 뭔가 허가가 필요할 때, 공산당 간부 누군가와 룸이 구비된 고급 식당에서 마오타이 잔을 주고받으며… 말하자면 이런 식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꽌시의 나라는 중국이 아닌 미국인 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모든 것에서 꽌시, 즉 네트워크의 힘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서 작동한다. 예전에 내 아이가 어떤 특정한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연락해 봤더니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최소 2-3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이 소아과 의사가 우연히 듣고, 자기 이름 이야기해 보라고 해서 반신반의하면서 말해 봤더니 마치 당연하다는 듯 대기시간을 3개월에서 2주로 즉시 줄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 담당자는 원래 규정상 이러이러한 것은 안 된다고 했었는데, 연말에 격려금도 좀 주고 친해지고 나니 알아서 자기가 이러이러하게 해 주겠다고, 원래 안 되지만 자기가 커버해 줄 테니 그런 줄 알라고 하기도 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까지 종합해 보면, 가고 싶은 회사 팀의 매니저나 최소 팀원 누군가를 잘 알지 못하면 그 팀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아진다. 이미 그 팀에 자리가 나기 이전부터 매니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쌓아 온 누군가가 이너 서클에 자리 잡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한국에서는 누가 보기에도 훌륭한 이력서는 최소 서류는 통과하겠구나 라는 합리적 기대를 할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주변에 와 하는 친구들도 그냥 조용히 서류접수를 한 경우 그냥 조용히 까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한국에서는 최소한 팀원 급에서는 HR팀에서 공개경쟁 시스템에 따라 진행하는 공채 형식이 많고 담당 매니저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권을 가지고 자기 사람을 뽑는 일은 적은 편이지만 여기서는 후자가 일반적이며 공개경쟁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밀어줄 내부의 누군가를 알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요약하자면, 오늘날의 한국은 일반적으로 담당자의 재량을 줄이고 시스템이 불특정 다수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인 반면 미국은 아파트 관리사무소부터 회사의 매니저 디렉터들까지 어떤 표준적인 절차를 지켜야 할 의무보다는 각자의 재량을 더 크게 부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합법적 범위 내에서 그런 재량을 최대한 이용하려 하고, 그래서 인맥이 더 중요해진다. 뭐, 좋다. 각자의 재량 범위가 크다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 공정성은 희생된다. 나보다 먼저 줄을 서 있었지만 우리 소아과 의사를 알지 못한 사람들, 우리 아파트에 살지만 딱히 관리사무소 담당자와 친해질 일이 없었던 사람들, 실력은 있지만 매니저와 끈이 없는 사람은 모두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에 대해 딱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네트워크를 잘 만들어 활용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으로 인식되고,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나도 어떻게든 네트워크를 잘 만들어 이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우리만큼 중요시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모나 문화적으로 같은 민족인 데다가 대도시에 모여 살면서 모두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무얼 하는데 나는 그걸 못 하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기 쉽다. 미국은 아무래도 나라의 구성원들이 인종적 문화적으로 너무 다양하고 서로 각자의 영역(물리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에서 모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시스템에 대한 심리적 요구가 적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미국처럼 인종, 문화, 언어, 계층적으로 다양한 나라에서는 어느 수준 이상으로 공정성을 중시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머리 아픈 일인지도 모른다.


이 동네(워싱턴 DC 근교)에서 성공하고 부유한 백인 가정들은 주로 DC 주변 메릴랜드(MD)와 버지니아(VA) 주 중에서 DC에 들어오기 쉽고 가까운 지역의 대저택에서 살고, 부부가 럭셔리 브랜드의 차로 각자 출퇴근을 하며 유기농 먹거리를 주로 파는 Whole Foods에서 장을 본다. 이들 지역은 최근 타 인종 특히 아시아인의 비중이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비율이 절대적이다. 그 다음 중산층 백인들과 다수의 아시아인은 그보다는 좀 더 떨어진 MD VA 근교에서 주로 일본차를 몰고 Safeway 같은 일반 대형마트 또는 H mart 같은 아시아 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그보다 도심에서 좀 더 떨어진, 좀 더 낡고 허름한 느낌의 동네에는 많은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이들은 현대, 기아 그리고 낡은 일본 중고차를 타고 라티노 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그리고 상당수의 흑인들은 DC 동부와 Anacostia 등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진 동네에서 현대, 기아, 낡은 일본 중고차 그리고 메트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월마트와 코스트코에서 장을 본다. 그리고 이런 미국에 들어오기 위해 브로커에 돈을 주며 대기 중인 수많은 라티노들이 트럼프의 서슬 퍼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입되어 새로운 이민자 계층이 된다. 이렇게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공존하지만 완전히 섞이지 않으며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스템에 대한 요구 자체가 적을뿐더러 그런 시스템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꽌시/네트워킹 이야기로 돌아와서 - 사실 생각해 보면 네트워킹은 중요한 사회적 스킬이자 복잡 미묘한 아트(Art)다.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에는 나의 힘으로 직접 얻는 방법과 남의 힘을 빌어 얻는 방식이 있는데 전자는 직선적이고 1차원적인 반면 후자는 간접적이고 다면적이다.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둘 모두를 필요로 한다. 전자만 발달하면 공감능력 없는 외골수가, 후자만 발달하면 교활한 정치꾼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사회 경험이 쌓이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후자가 점점 중요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든 신입이나 대리 과장 때에는 머리 잘 돌아가고 몸 바쳐 일하는, 자기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높은 타입이 주목받지만 어느 이상 올라가고 나면 결국 영업을 하게 되어 있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서는 이 영업을 잘해야, 그리고 각 분야의 실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자기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 어느 시점 이상부터는 개인 능력 개발보다 용인술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지능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공부머리보다 대인 지능의 중요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다른 외국인들의 조직문화를 빨리 파악하여 적응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들, 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관심을 갖고 잘 이해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잘 캐치하는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한국의 교육시스템이나 사회는 어쩌면 다른 나라에 비해 공정하고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서 좋긴 한데 (한국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제 자식 꽂아주기가 심심치 않게 뉴스에 오르는 탓에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미국이나 중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마 뉴스거리 자체가 되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면 한국 시스템에서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면 때문에 네트워킹 능력이나 대인 지능의 중요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초중고에서부터 아이들의 사회성과 대인 지능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발견하여 평가해 주거나 최소한 하나의 지능으로서 인정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윗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아부를 하거나 대가성 청탁을 하라고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의 정 흐름을 잘 읽으며 상호작용하는 의사소통 스킬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관계는 언제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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