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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an 29. 2020

종교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잡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종교 이야기

1. 얼마 전에 lyft (차량 공유 서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운전기사인 흑인 여성과 한참 수다를 떨게 되었다. 뉴욕 출신인 그녀는 불교신자라고 했는데 흑인 미국인 여성이 불교신자라니 뭔가 특이해서 어떻게 불교신자가 되었느냐고 물어봤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점점 기독교의 교리가 이해가 되지 않고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정 시간 동안의 soul searching을 통해 자신에게는 불교가 잘 맞는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불교가 어쩌면 오늘날의 미국, 서구사회에 잘 맞는 종교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사회 - 다양한 민족/배경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잘 살아야 하는 사회이자 예전에는 숨어 지내던 성소수자들이 양지로 나와 행진을 하며 자신들에 대한 존중을 외치는 사회, 또 동물들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사회 - 에서는 우리 신을 믿으면 천국 가고 아니면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종교보다는 개인적인 명상과 포용적인 사상을 가진 종교가, 사람 대신 동물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내던 종교보다는 모든 생물을 비교적 동등하게 존중하는 종교가 좀 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요즘 미국인들은 예전보다 덜 religious 하지만 (덜 종교적이지만) 더 spiritual 하다 (내면/ 정신세계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 회사 내에서도 최근 미국인/유럽인 주도 하에 명상 클럽이 2개나 생겼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또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20-30분간 조용히 참선/명상하는 것인데 인도 요가 음악 같은 것을 틀어놓고 한다. ‘당신의 머리 위에 빛이 내려오는 상상을 하세요... 당신의 차크라가 당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30분간 눈을 감고 조용한 상태에서 저런 속삭임을 들으며 앉아 있다 보니 내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등 평소에 일상생활에서 할 수 없었던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요즘처럼 지식과 정보는 많고 사는 것은 점점 복잡해지는 시대에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게 하는 불교나 인도철학 같은 것이 조금씩 세를 불리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그런데 불교 하니까 나름 입시공부 열심히 한 한국인으로서 갑자기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것이 떠올랐다. 요즘 미국에서 불교가 세를 불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수용했다고 배웠다. 당시에는 왕권 강화와 불교가 대관절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깔끔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고 그저 외우면 그만이니 넘어갔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에 대한 답이 될만한 가설이 하나 떠오른다.


사람이 종교를 찾게 되는 때는 주로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힘들 때다. 한 마디로 사는 게 힘들면 사람들은 해답을 찾고, 그 해답을 주는 것 중 하나가 종교다. 우린 왜 사는 게 이렇게 힘든지, 이 넘치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백성들이 혹시라도 ‘아 정말 못살겠네, 내 위에 군림하는 인간들을 다 처단하고 세상을 뒤엎어버리자' 같은 쪽으로 해답을 찾아 버리면 지배층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된다. 지배층 입장에서는 가난과 질병, 전쟁으로 스트레스받는 백성들이 ‘속세의 일’에는 신경을 끄고 ‘나의 번뇌는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양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열반의 길이다'라는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용히 평화롭게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다면 그보다 좋을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누군가 살아있는 자를 리더로 숭배하는 종교라면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 통제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로마인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그런 것도 아니었던 불교는 당시 지배층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 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불문하고 그렇게들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교로 지정하려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3.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은 종교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현재 이 세상의 메이저 종교들인 기독교/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유대인들의 고대 종교(구약)에서 탄생했다. 성경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당시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피지배 계층으로 살았다.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30년간 받고 나서 민족적 트라우마가 컸고, 민족 자존감 부흥을 위한 문학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하물며 당시 유대인들은 한 민족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피지배 계층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민족적 자존감이 상실되었겠는가. 우리 민족, 다들 똑똑하고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데 어쩌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 우리는 절대자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다. 현생은 잠깐일 뿐 죽으면 우리는 천국에 간다. 게다가 유노 왓, 우리의 구원자가 조만간 오셔서 다 심판하고 쓸어버릴 것이다'라는 믿음은 너무도 달콤했을 것 같다. 또는 그 정도의 절대적 믿음이 없이는 유대인으로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에도 몇십 년을 나라 없이 사막에서 떠돌았다. 이쯤 되면 ‘신께서 우리가 들어가 살 땅을 예비해 주셨다. 저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살라고 하셨다’라는 말이 꿈에서라도 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뉴욕 Queens의 한 지하철역에서 이슬람교 교인이 쿠란을 무료로 배부하며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논리적, 이성적으로 교리를 설명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기독교와 비교하여 이슬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이었는데, 쿠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마호메트에게 아랍어로 내려왔기에 아랍어로 쓰인 쿠란만이 정본이고, 신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달리 헬라어 (그리스어)로 시간차를 두고 쓰였기 때문에 정통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당연히 진지하게 이야기했지만 아랍 문화권과 거리가 먼 내 입장에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신께서 많고 많은 언어들 중에 굳이 글자도 알아보기 힘든 아랍어를 자신의 오피셜 랭귀지로 지정하실 이유가...’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언어와 종교를 가진 유태인들은 중동 지방에서 아주 작은 소수 민족에 불과하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은 모두 아랍어를 사용하는 범 아랍 문화권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지역의 주류인데 신께서 소수민족인 유태인만을 선택했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심리적으로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 종교의 시초와 기본적인 내용은 받아들인다 쳐도 중간에 예수라는 유대 지역 인물이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를, 심지어 그 이야기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책을 자신들의 성경이라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그보다는 마호메트라는 아랍인 선지자가 영웅적으로 등장하여 신께 아랍어 오리지널 정본인 쿠란을 받아왔다는 이야기가 심리적으로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만약 과거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종교가 전 아시아 지역으로 퍼졌다고 하자. 그러면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지역의 중심인데 변방 국가인 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 선지자가 중간에 등장하여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중국어 정본인 성경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5. 종교라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여러 질문에 해답을 제공하는 하나의 완결된 패러다임이다. 각각의 종교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리고 내 인생이 힘든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답 체계를 갖고 있고 신자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특히 상당 부분 발전되고 정교화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하나의 종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이성적,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생존하고, 짝을 찾고, 번식하여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일을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욕구와 감정들은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뇌와 신경계와 화학물질로 구성된 신호체계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좀 살아 보니 이것만큼 그럴듯한 설명이 없다. 나는 20대에는 어떻게든 신체와 정신이 훌륭한 이성을 사귀고 싶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으며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었다. 그러다 30대 어느 시점에서는 결혼이 하고 싶었고 결혼 이후에는 아이를 갖고 싶었다. 지금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내가 그때 왜 그런 것들을 그렇게까지 강렬히 원했었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과거의 강렬한 욕구들이 제로가 된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처자식 잘 부양하는 것이 내 모든 행동의 기본 전제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황만 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본능적인 선호나 취향 자체도 변했다. 결국 나는 자유의지 그런 거 잘 모르겠고 그저 인생의 단계에 따라 내 뇌/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과학이 종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은 잘해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무엇이고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설명하더라도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에 과학은 허무주의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언젠가 병원 침대에 누워 ‘그동안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숙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잘 살았군. 이제 죽으면 그저 내 뇌에서 신호가 멈추고 나의 몸은 자연 분해되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죽음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재벌 총수부터 사형수까지, 마지막 순간이 가까울 때 종교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마음이 힘들 때, 우리는 과학보다는 좀 더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아직 종교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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