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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Mar 11. 2020

엑기스만 취하는 현대인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의미 있을까

유기농 식재료로 유명한 미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의 이름은 Whole Foods이다. 통곡물과 같이 정제되지 않는 온전한 식재료, 말 그대로 Whole 한 식재료를 판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사실 현대인의 식생활이 대부분 Whole 한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설탕을 비롯 정제 당류를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 설탕은 원래 사탕수수라는 자연의 재료에서 탄생하였다. 사탕수수라는 작물을 잘라서 씹어 먹으면 억센 섬유질이 으깨지면서 달짝지근한 즙이 나온다. 자연 그대로의 재료라면 이렇게 턱이 아프도록 씹어먹어야 하지만 사탕수수를 가공하여 만든 설탕은 입에 털어 넣기만 하면 즉시 강렬한 달콤함을 선사한다. 그 설탕을 우리는 콜라 한 캔에 8숟가락, 케이크 한 조각에 6숟가락, 심지어 요즘은 김치찌개에도 몇 숟가락씩 넣어 먹는다. 통곡물 대신 정제된 밀가루로 만든 하얗고 부드러운 빵을 먹고, 커피콩을 직접 먹는 것이 아니라 다량의 커피콩을 볶고 잘게 갈아낸 후 스팀을 쏘아서 그 엑기스만을 뽑아 정신이 번쩍 드는 카페인 농축 액체로 만들어 마신다. 우리의 식생활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향상되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않는 것에서 분리하여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음식문화만 이런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에는 나의 여러 가지 모습 중 잘생기고 행복하고 자랑하고 싶은 엑기스만 전시되고, 나의 비루한 모습이나 아등바등 노력하는 모습, 망신스럽거나 외로운 모습 같은 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언제나 좋아요 (Like)만 받는다. 페이스북에는 싫어요 (Dislike)나 정말 싫어 (Hate) 또는 안물 안궁 (Whatever) 같은 버튼은 없다. 애초에 그런 말을 듣거나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게 싫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자랑하는 것인데 누가 내 페북에 불편함을 표현한다면 페북 페이지를 무슨 재미로 관리하겠는가. 현대인의 여가생활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상매체도 마찬가지다. 화끈한 액션 영화는 실제로 내 몸에 땀이 나고 숨이 차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면서 고통을 받는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시각적 청각적 쾌감만을 제공한다. 그런 자극을 받으면서 나의 몸은 실제로 푹신한 소파에 2시간 내내 앉아 있으며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스릴러 영화나 TV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인생이라면 평생 한두 번 정도 겪을까 말까 한 배신, 살인, 불륜 등의 강렬한 드라마가 수십 분마다 반복된다. 내가 직접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좌절하고, 갈등하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클릭 한 번으로 오로지 시각적, 말초적 쾌락이라는 결과만을 쉽게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사회/여가생활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향상되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에서 분리하여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현대인의 생활에 문제의식을 갖고 우리의 삶을 조금만 과거로 되돌려 정제 식품의 섭취를 줄이려 한다면, 그리고 과도한 온라인/영상매체 의존도를 줄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온전한 삶 (Wholesome life)을 향유할 수 있게 될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우리의 문명은 이미 엑기스만 취하는 삶으로 바뀐 지 아주 오래이기 때문이다. 화폐경제의 발달과 분업화, 기계의 발달 등으로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이미 어떤 연쇄적인 행동의 결과만을 취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내가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사 먹을 때, 한 마리의 소를 식용 목적으로 기르고, 그 살아 있는 소를 먹기 위해 죽이고 난 후 뼈와 살을 발라 내가 먹을 만큼의 덩어리를 구워 내는 일련의 모든 작업은 필연적으로 어디에선가 일어난다. 그 모든 일을 내가 직접 하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한다면 분명 감정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소모적인 과정일 것이고, 그래서 정말 배고프거나 집안 행사에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잘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도시화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과정에 조금도 관여되지 않아서 아무런 감정적, 육체적 소모 없이 돈을 지불하고 잘 구워진 고기를 거의 매일 입에 넣는다.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가 고도화되기 전에 우리는 대부분 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 및 이웃들과 평생 마주치면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해 직간접으로 잘 알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능적인 무언가를 취할 때 그들의 감정과 인격 및 현재 사정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화, 분업화 이후 우리의 인간관계는 더 이상 연속적, 복합적이지 않다. 다 고향 떠나 온 사람들이라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아파트 수위 아저씨나 음식 배달부에게 그 특정 기능과 관련된 일 말고는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인간적인 관심을 주지 않는다. 단절적이고 1차원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기능적으로 필요한 것만 취한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일은 얼핏 이 모든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는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도, 나를 평가하지도, 나에게 말로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연대감과 행복감은 적당히 제공하면서도 사람 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례 발생하는 모든 기분 상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감정의 캐파가 적은 현대인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애완동물을 키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고 그 동물을 입맛에 맞게 교배하여 우리가 원하는 성격과 외모를 가진 존재들로 만들어 애완동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또한 분업화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고도 일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면서 내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감 능력이 거세되고,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아도 되면서 좀 더 쉽게 원하는 것만을 뽑아내는 삶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원치 않는 과정을 피하고 원하는 엑기스만 뽑아내 취하는 삶의 결과는 항상 즐거워야 할 것 같지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듯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설탕 과다 섭취는 우리의 몸에 지방을 과다 축적하여 건강을 위협하고 우리의 감정 기복을 악화시킨다. 카페인 과다 섭취는 과도한 각성으로 인해 불면과 정신적 피로를 야기한다. 소셜 미디어와 영상매체 중독은 우리에게서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능력을 서서히 빼앗아 간다. 분업화와 사회의 고도 발달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의 발달을 현저히 저해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쌓일 틈이 없는 인스턴트식 사회관계는 이미 부족한 우리의 갈등 해소 능력을 더욱 부족하게 하고 사회 분열을 심화시키며,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우리는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독히 외로워진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들은 쉽게 살찌고, 만성적으로 정신이 피곤하고, 항상 외롭다. 그래서 은근히 불행하다.


이런 불행을 타파하기 위한 해답은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돈을 더 벌고 더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은 근본적인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아름다움과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은 나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힘이 강해지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농축된 엑기스를 더욱 쉽게 얻는 길로 나아가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생각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재벌 2세들과 유명 연예인들이 술과 파티 그리고 마약에 손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아주 자연스럽다. 이들은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고’, 하면 당장 즐겁기 때문에 자기 통제나 경계심이 특별히 큰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쾌락의 엑기스만 취하는 행위는 꼭 마약과 같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칭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돈과 권력으로는 우정도 사랑도 살 수 있다. 정말 깊은 우정과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면 모를까, 적당히 외롭지 않을 만큼의 우정과 사랑은 쉽게 살 수 있다. 굳이 내가 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기도 한다. 나의 돈과 권력에 매혹되어 어떻게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천지이기 때문에 나는 딱히 노력할 필요도 없다. 결국 친구와 연인을 위해 한번 더 생각하고, 마음 쓰고, 마음에 들기 위해 고민하고, 다투었다 풀어지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는 등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어딘가에 속한 듯한 감정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뭐든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기 쉽다. 이렇게 쉽게 얻은 사람들은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떠난다. 문제는 내가 관계를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깊게 이해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그냥 또다시 새로운 사람을 쉽게 얻어 외로움을 달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화된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바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엑기스만 취하는 삶을 지양하고, 모든 즐거운 것에 따라오는 노력, 고난, 상처를 함께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달콤한 설탕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질긴 펄프를 함께 입에 넣고 턱이 아프도록 씹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귀찮고 힘들더라도 그들의 진실된 감정과 이야기를 받아 주면서 서로를 더욱 깊이 알아 가고, 거기에서 오는 깊은 우정과 보다 따뜻한 연대감을 누리는 것이다. 쉽고 빠른 성취보다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마침내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내가 가진 힘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내가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좀 더 중장기적으로 힘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마침내 이루었을 경우 느낄 수 있는 벅차오르는 즐거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면 당장 내 마음속의 불안감, 초조함, 짜증, 시기와 질투, 그리고 허무함 등의 감정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에는 과정이 따르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움과 고통은 함께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시간차가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긴 호흡으로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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