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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귀가 있다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정재호 원장의 수술 일기>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문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오로지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았다.
세상이 사랑의 대상들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았다.’ (16쪽)  


지금은 세상을 떠난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글을 읽는다.
암 선고를 받고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쓴 메모를 모은 책이다.
짧은 문장인데 울림은 길게 이어져 말없는 시간이 길어진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103쪽)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만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는 자주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까지 잊고 살았다!


죽은 이의 글을 읽으며, 병원 옥상 텃밭에 상추며 깻잎의 모종을 심었다.
윤동주 시인이 불렀던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민트, 바질, 로즈메리 같은 이국의 허브도 심었다.
살아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초록의 푸성귀들이 속삭인다.
초록 생명의 생생한 기운을 받아 수술실로 들어간다.
오늘은 귓구멍과 귓바퀴를 동시에 만드는 동시 재건수술이다.
환자의 귀를 만드는 동안 김진영 선생의 글귀가 변주되어 떠오른다.


내게 귀가 있다는 것-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사는 내내 귀가 없다는 아픈 현실을 절대 잊을 수 없었을 환자에게
귀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해주고 싶다.
아홉 시간의 긴 수술이 그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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