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1
2017년 6월 17일. 그날이 내가 처음 벌새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을 한 날이다. 미국에 산 기간이 2007년 8월부터였고, 여름마다 내 주변에는 벌새가 붕붕거렸을 텐데 한번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왜 하필 10년이 지난 2017년 여름에 벌새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우선 그때의 내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세 한탄에 눈물 콧물 섞어서 A4용지 10장은 채우고도 남을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남편의 길고 험난했던 박사과정이 끝이 보이긴커녕 오히려 더 어둡고 갑갑한 터널 속에 정체되어버린 듯한 시기여서, 나 스스로 어떤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우울로부터 헤어날 길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혼자 여러 해 동안 집필해서 한국에 들고 갔던 원고들은 매번 제대로 봐주는 사람도 없이 잊혀지는 바람에 작가로서 재기할 수 있을지, 내 글이 재미있기라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냥 미국생활을 즐기며 놀기만 했더라면 차라리 덜 억울했을 것이다!)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준 사람은 나의 요리선생님이자 멘토인 존 선생님이셨는데, 존 선생님 집에 갈 때마다 선생님이 부엌 창밖에 걸어둔 벌새 피더에 벌새가 오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고 점차 나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피더는 관엽의 아래쪽 가지에 걸려 있어서 벌새들이 안심하고 드나들었지만 그늘져 있다보니 벌새들의 몸은 온통 진회색으로만 보였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가슴이 메탈릭 레드로 반짝이는 수컷벌새를 보고서야 나도 넥타통을 걸어놔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에 가는 길에 월마트에 들러서 몇 가지 식료품을 카트에 넣은 후,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가드닝과 야외용품 섹션에 가서 벌새 관련 용품을 둘러보았다. 철새인 벌새들이 조지아에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3~4월 무렵이었으므로 벌새 피더가 팔리는 시기도 한정적이었다. 6월엔 거의 인기가 없는지, 10달러 짜리 피더(feeder. 넥타통)를 5달러에 파는 할인행사를 하고 있었다. 유학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반값' 이라는 말에는 조건반사 작용이 일어난다. 나는 노란 플라스틱 꽃송이 3개가 붙은 5달러짜리 플라스틱 넥타통과 빨간 설탕물이 담긴 시판 넥타 1.5리터를 구매했다. 넥타를 만드는 공식은 일반 꽃의 넥타 농도와 비슷하게 25% 설탕용액을 만드는 것이라고 존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끓인 물 4컵에 설탕 1컵을 녹인 다음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조금씩 피더에 넣어서 걸어두면 벌새가 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귀찮았기에 시판 넥타가 다 떨어질 무렵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집에 와서 보니 우리집 부엌 유리창 밖에는 키 큰 나무가 가까이 없어서 피더를 걸어둘 곳이 없었다. 월마트에서 팔던 피더걸이용 검은 금속 스탠드는 20달러가 넘었다. 바로 그때, 아파트 쓰레기 집적소에서 전날 보았던 고물 스탠드 등이 생각났다! 조금만 바람이 불면 픽 쓰러지는 싸구려 스탠드여서(집안에는 바람이 불지 않으니 그리 튼튼할 필요도 없다), 전구를 사서 꽂으면 불이 켜질 수 있는데도 아무도 들고 가지 않았다. 만약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벌새 피더를 걸기에 제격이 아닌가! 나는 당장 스탠드를 찾으러 갔고, 인기 없는 그 스탠드는 아직도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당장 주워와서 뒤뜰에 세웠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게 분명하니까 지난 해 토마토를 심었던 낡은 플라스틱 화분 속에 스탠드를 넣고 허술한 스탠드 받침 위를 돌과 쓰지 않는 작은 화분들로 눌러주었다. 스탠드 위쪽에 붙은 허술한 철제 전등 장식은 피더를 걸기에 적합했다.
유학생활이 길어지면서 재활용 잔머리만 늘어서, 돈 들이지 않고 주변의 재료로 어떤 기능을 대체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가구, 옷, 주방용품 등은 유학을 마치고 가는 사람들이 새로 온 유학생들에게 물려주었고, 유학년수가 길어지면 그렇게 받은 추억의 물건들이 늘어나 더 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생활이다보니 한 순간 다 버리고 갈 수 있는 물건들로 사는 삶에 익숙해지고, 굳이 그런 물건에 돈 들이지 않는 게 습관이 된다. 그래서 새로운 용도가 나타나면 기존의 물건들로 발명 아닌 발명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이게 유학생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현명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 어차피 갑자기 닥쳐올 어느 날, 우린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거니까... 나는 고물 스탠드 고리에 피더를 걸었다. 좀 없어보이긴 했지만, 벌새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의 벌새 피더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벌새만 오면 된다!
그러나 그날도, 그 다음 날도 벌새는 한 마리도 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난 후에도 나흘이 지난 후에도 벌새는커녕 파리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부엌 창밖 방충망에 저녁마다 개구리, 도마뱀, 가끔가다 진짜 뱀(그래봤자 손가락 굵기라서 귀여운)이 고개를 내밀기는 했지만.... 갑자기 동네 벌새들이 싹 다 사라져서 우리 집에도 안 오는 건가 싶어서 존 선생님 집에 가보았더니, 더 많은 수의 벌새들이 번갈아 나타나 설탕물을 빨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리집 뒤뜰에도 피더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그제서야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이미 6월이었고, 남쪽에서 올라온 벌새들은 플로리다주에서부터 북쪽 캐나다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새끼를 낳고 있었다. 집 없는 벌새가 거의 없다는 뜻이니까, 새로 피더를 단다면 ‘공실’이 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벌새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나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장소도 아니고, 칙칙한 서민아파트 뒤편 좁다랗게 잔디가 깔린 뒤뜰 하고도 재활용품(사실은 고물 쓰레기) 스탠드에 걸린 싸구려 피더가(게다가 후발주자) 새로운 벌새를 유인하기란 교통편도 나쁜 농촌 구석에 카페를 차리고 도시 남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그것뿐인가? 이 피더의 주인은 벌새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게 없었다. 벌새가 철새이며 붕붕거리며 날고, 파리나 벌보다는 좀 크고 일반적인 새들보다는 작다는 사실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꽃이나 화초를 쉽게 죽여버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화초의 이름부터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우리 동네에 날아올 만한 벌새가 어떤 종류인지, 벌새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벌새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약간의 기초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위키피디아를 찾아본 후 벌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 나름 메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