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2
씨앗을 심은 후, 아직 싹도 안 올라온 그 자리에 나는 구석에서 잠자던 토마토 지지대 두 개를 꽂아두었다. 모두 내가 잘 내다보는 냉장고 옆 유리창에서 가까운 자리였다. 어떤 비전을 그리고 뭔가를 시작해보는 건, 아마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게 고작 토마토 지지대를 타고 올라 활짝 피어난 나팔꽃과 완두콩꽃에 벌새가 머리를 박고 꿀을 빠는 장면이긴 했지만 말이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하루 세 끼니와 간식을 내 손으로 해먹고 설거지를 하고, 자주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와 담화와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 장소가 부엌 공간이었기에 부엌 유리창 밖에 피더를 설치했다. 너무 노출된 곳을 싫어하는 벌새의 편의와 식탁에 앉아서도 창밖으로 벌새를 관찰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타협시키는 지점에 벌새 스탠드를 세워야 했다.
유학생들이 많이 사는 서민층 아파트이다보니, 아파트 정면 현관 주변에는 허리 높이의 회양목이 심겨진 화단 말고는 온통 포장된 도로와 주차 공간만 있어서 삭막해보였다. 그나마 아파트 뒤편에는 작은 테라스 공간과 좁은 잔디밭이 있어서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주었다. 잔디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건너편 아파트 단지와 우리 아파트 단지 사이의 담장 역할을 하는 철조망 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바깥으로 2~3미터 높이의 나무들이 빽빽히 심겨져 있어서 사생활 보호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 지대는 작은 새들과 동물들에게 최고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잔가지가 많고 작은 이파리가 촘촘히 달린 윈터베리 나무들 속에 카디널, 브라운뜨래셔, 모킹버드, 블루제이 같은 여러 종류의 새들이 가족별로 살고 있었고, 저녁마다 토끼 가족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토끼 굴 같은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부엌쪽이 북동향이어서 오전에만 햇빛이 들었는데, 나는 테라스 옆쪽의 잔디가 벗겨진 작은 공간을 나의 깻잎 화단으로 둔갑시켰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만, 그곳을 가득 채우며 자라난 깻잎밭은 나와 한국 친구들이 여름 내내 먹을 깻잎을 제공했다. 깻잎이 떨어지고 들깨가 익어가는 가을이 되면 윈터베리 나무에 숨어 살던 새들이 날아와서 아침마다 기름진 들깨로 식사를 했다. 피더를 걸어두고 벌새를 기다리는 동안, 깻잎 대신 꽃을 심어두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창밖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았지만 벌새 한 마리 보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났다. 그래도 나는 벌새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없을 때만 벌새가 다녀갔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저녁 6시라고 해도 아직 훤하게 밝은 시각에 외로운 싱글 유학생 후배들을 초대하여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돈 없는 유학생 와이프 처지에 동생들을 먹여야 하니 늘 가성비 좋은 요리를 했는데, 미국에서는 저렴했던 소고기 생등심을 사서 야채와 파인애플을 끼워 꼬치구이를 하거나, 한국마트에서 사 온 오징어와 냉장고에 남은 야채를 이것저것 넣고 오징어파전을 굽곤 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그 메뉴는 훠궈나 샤브샤브, 부대찌개, 독일 소세지 속을 넣어 만든 퓨전 왕만두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처럼 어른이랍시고 식당에 데려가서 밥을 사먹였다면 한 20만원 이상씩은 깨졌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한 끼는 10명이 함께 먹어도 재료값이 얼마 되지 않았다. 둘이서 외식할 돈이면 10명을 집으로 초대해서 후식까지 여유롭게 먹을 수 있었고, 나보다 부유한 가정 출신인 동생들이 과일이나 케익, 파이 같은 후식들을 알아서 사와서 배부르게 먹고도 뭔가가 많이 남았다. 그날의 메뉴는 내가 만든 오징어 파전에 한인마트에서 공수한 막걸리. 금방 부친 부침개를 식탁에 놓으면서 문득 창밖을 보니 작고 까만 물체가 내 피더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날개를 저으며 공중에 뜬 상태로 노란 플라스틱 꽃송이 중앙의 넥타 구멍에 부리를 넣고 있는 건 분명 벌새였다!
“창밖을 봐! 벌새가 왔어! 너희들이 행운을 가져왔나봐!”
동생들도 다 같이 그 벌새를 목격했다. 그러나 벌새는 아주 잠시 맛만 보더니 사라져버렸다. 벌새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일주일 동안 틈만 나면 창밖을 내다보며 기다렸는데 안 오더니, 손님 시중드느라 나가볼 수도 없는 시간에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다니... 나랑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란 말인가! 30분 후쯤에 같은 벌새인지 다른 벌새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아까보단 좀 더 오랫동안 넥타를 먹다가 떠났다. 손님들은 내가 왜 그 작은 벌새를 보고 그토록 환호하는지 의아해했지만, 뭐든지 일주일이나 목을 뽑고 기다리다가 만나게 되면 그 기쁨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너무 보고 싶어서 꿈에서 만났던 볼드이글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철새인 볼트모어 오리올즈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다.
다음날 아침 일찍 뒤뜰 테라스로 나가 스탠드에 걸린 피더를 내렸다. 넥타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보고 설탕물을 더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육안으로 보아도 넥타 색깔이 좀 누리끼리했다. 넥타통을 뒤집어 뚜껑을 열었더니 쉰내가 확 풍겨왔다. 넥타가 상한 것이다! 하긴 섭씨 30도가 넘는 조지아의 초여름 날씨에 넥타통을 일주일 동안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두었으니, 데워졌다 식었다 하면서 상해버린 것이 이상할 게 없었다. 내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식당 아줌마였다면 상한 음식을 먹은 손님에게 일찌감치 고발을 당해 영업정지 처분을 당했을 것이다!
설탕물을 걸어놓으면 벌새가 온다는 것만 알았지, 그게 상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하다니! 시중에서 파는 방부제가 든 벌새넥타라고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어제 저녁 이 넥타물을 마신 벌새가 앓거나 죽진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부엌으로 들어와 넥타통을 깨끗이 씻고,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넥타를 다시 채우다 생각해보니 이것으로 부족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 코딱지 식당이 남들과 똑같은 맛의 음식을 만든다면 경쟁력이 없어도 너무 없을 것이다. 화려한 꽃들이 핀 넓은 정원에 고가의 유리공예 피더를 십여개씩 달아둔 집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일단 넥타를 다시 만들었다. 꽃의 넥타와 같은 농도라는 25%가 아니라 33% 설탕 용액을 만들었다. 설탕 한 컵에 끓인 물 네 컵이 아닌 세 컵을 부어서 녹였다. 비록 처음부터 소문이 나진 않겠지만, 한번 나의 넥타를 맛본 벌새라면 놀라운 당도에 감복하여 다시 찾아올 게 분명했다. 한번에 한놈만 팬다는 전략으로 벌새 한 마리 한 마리를 감동시켜 단골을 만드는 것이다!
막 오픈했지만 허름한 식당 주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장 근처 월마트로 출동하여 허밍버드가 좋아한다는 꽃들 중에 가장 값이 싼 붉은 페튜니아꽃 화분을 두 개 샀다. 정리 세일로 정가 5불짜리를 2불에 판다고 했기 때문이다. 생과일주스와 같은 꽃 넥타도 빨 수 있다면 벌새들이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약간 시간이 걸리는 계획이긴 하지만 나팔꽃과 완두콩 씨앗도 사서 심기로 했다. 둘 다 허밍버드가 좋아하는 꽃이 피기도 했고, 어린 시절 흔하게 보던 보라색 나팔꽃이 갑자기 그리워져서이기도 했다. 6월이 좋은 파종시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9월초 허밍버드가 떠나기 전까지는 몇 송이 필 것이다.
씨앗을 심은 후, 아직 싹도 안 올라온 그 자리에 나는 구석에서 잠자던 토마토 지지대 두 개를 꽂아두었다. 모두 내가 잘 내다보는 냉장고 옆 유리창에서 가까운 자리였다. 어떤 비전을 그리고 뭔가를 시작해보는 건, 아마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게 고작 토마토 지지대를 타고 올라 활짝 피어난 나팔꽃과 완두콩꽃에 벌새가 머리를 박고 꿀을 빠는 장면이긴 했지만 말이다.
반짝이는 무지개 조각(a glittering fragment of the rainbow), 숨쉬는 보석(a breathing gem), 불타는 마법의 홍보석(a magic carbuncle of flaming fire)...나보다 앞서 벌새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들의 뛰어난 묘사능력 앞에서 나는 불꽃놀이, 오로라, 크리스마스의 전등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다가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린다.
사이 몽고메리의 책 <버달러지(Birdology)>에 의하면, 고대 멕시코인들은 벌새를 "태양 광선(rays of sun)", "낮별의 머릿단(tresses of the day star)"이라 불렀고, 도미니카 공화국의 사람들은 "윙윙대는 꽃(buzzing flower)"이라 불렀으며, 포르투갈 사람들은 "꽃 뽀뽀쟁이(flower kisser)"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반짝이는 깃털들이 케라틴, 즉 인간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말의 발굽, 코뿔소의 뿔, 물고기나 뱀의 비늘, 독수리의 발톱 등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게다가 에메랄드와 루비빛도 색소 때문이 아니라 미세한 털들을 부풀려 빛을 반사시켜 만드는 것이며, 모든 털의 심지(깃대)는 피부 아래 근육에 닿아 있어서 털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이야 어쩌다 춥거나 무서우면 털이 바짝 곤두서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는데, 벌새는 깃대 하나하나를 무수히 많은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깃털로 이루어진 벌새의 깃털옷은 벌새의 피부와 한몸이며, 필요에 따라 얇고 가벼운 방수복에서부터 전투용 갑옷까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비록 단벌신사이지만, 집도 없이 사계절을 버틸 수 있는 비밀이 그 한 벌의 깃털옷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더울 땐 시원하게 열어주고, 추울 땐 꼭꼭 여며 따뜻한 공기를 가둬줌으로써 체온도 조절한다. 짝을 유혹해야 할 땐 빛을 활용하여 반짝이 의상으로 갈아입고 춤추었다가, 자신과 새끼를 보호해야 할 땐 그늘 속에 숨어 눈에 띄지 않는 잿빛 생명체로 변신한다. 몸 크기가 작으니 자연이 만들어낸 작은 틈이나 조금 두꺼운 이파리 밑에 숨으면 웬만한 자연재해는 피해갈 수 있다. 어찌보면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곳을 자신의 집처럼 사용하는 단벌신사인 것이다.
모든 새들이 그렇겠지만 벌새들을 관찰해보면, 깃털을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특히 기나긴 철새여행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 되면 더 오랫동안 꼼꼼이 깃털을 다듬고, 성능을 실험한다. 온몸의 털을 다 부풀리고 세웠다가 눕혔다가 방향을 돌렸다가 하느라 벌새의 모양이 펭귄에서 다스베이더로, 다시 백조나 학처럼 바뀌어간다. 옷을 빨 수는 없지만, 깃털이 낡아 너덜너덜해질 무렵이면 때를 맞춰 순서대로 털을 갈기도 한다.
처음엔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단벌신사처럼 생각했던 벌새가, 보면 볼수록 나보다 고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함께 계신 곳이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 나의 포근한 집이었는데, 출가한 후 떠돌다보니 나는 영원히 집을 잃은 느낌이다. 부모가 원했던 자식으로서의 내 옷을 벗고,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 입기까지 20년도 넘는 세월이 걸린 것 같은데, 벌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자신의 옷을 분명히 알고 입는 것만 같다.
어떤 집에 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차피 몇년 살지도 못하는 집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영원히 내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집에 갇히고 만다. 힘들게 집을 마련하더라도, 빚을 갚으며 집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을 갈아넣으며 고달프게 일해야 한다. 집을 만드는 순간 인간의 거주 공간은 줄어들고 제한되는 반면, 집 없는 벌새는 집 밖이 모두 자기 집이어서 세상을 다 소유한다. 작디작은 벌새가 감히 이 세상의 절반 거리를 날아다니며 여름 집과 겨울 집을 구분한다는 건, 그만큼 벌새의 소유가 광활하다는 뜻이다. 나도 그러면 안 될까? 집 안도 내것이지만 집밖도 내것일 수는 없을까? 살아있는 동안 집 하나를 얻기 위해 지나치게 수고하지 말고, 최대한 작은 집을 소유하며, 최대한 집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좀더 넓은 공간을 누려보자고 결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