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10-2
오후에 잠깐 폭우가 지나간 후 하루종일 간질간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새들이 이런 날 뭐 하는지 보려고 부엌창 블라인드 사이로 내다보았다. 맑은 날이라면 여전히 밝아야 할 7월의 오후 5시였지만, 먹구름이 끼어서 저녁 8시처럼 어두웠다. 벌새 피더 주변에는 벌새들이 보이지 않았고 토마토 지지대 위에만 암컷 벌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우리집 토마토 지지대는 토마토 줄기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벌새 휴게실이자, 나팔꽃과 완두콩 줄기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벌새가 좋아하는 나팔꽃과 완두콩이 자라서 꽃을 피우면, 벌새들 사이에 인공 설탕물이 아니라 천연꽃꿀을 먹으면서도 휴식할 수 있는 철제 벤치가 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서 더 많은 벌새들이 몰려올 것이다. 비록 내가 너무 늦게 이런 계획을 세우고 씨앗을 뿌린 바람에, 다른 집 나팔꽃들은 키 높이 이상으로 감고 올라가 한창 절정의 개화기를 맞고 있는 지금 우리집 나팔꽃은 겨우 폭염을 뚫고 10여센티미터 가량 힘겹게 자란 정도였지만 말이다. 꽃이 없다보니 벌거벗은 철제벤치(벌새 입장에서는 벤치가 맞다)만 덩그러니 놓인 형국이어서 핫플레이스는 못 되고 단골 벌새들만 찾아오는 미완의 숨은 카페 정도에 그쳤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인해 벌새 경쟁이 적어서 한두 마리 벌새가 토마토 벤치(철제벤치보다는 토마토 벤치라는 말이 듣기 좋다)에 앉아 오랫동안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기분 좋은지 암컷 벌새는 그곳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에겐 작고 가느다란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작디 작은 벌새에게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굵직한 샤워기 물줄기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다. 빠른 속도로 내리지 않고 등을 쓰다듬듯이 천천히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 벌새는 날개를 펼치고 깃털 가닥가닥을 씻으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빗방울은 벌새의 가려운 등을 이리저리 긁어주는 손가락이 되었다. 벌새는 떨어지는 빗방울의 방향을 잘 봐두었다가 정확히 그 빗방울 아래에 필요한 몸 부위를 갖다대는 것 같았다.
날개 젓는 속도가 초당 80회에 달하는 벌새라면 사물의 속도를 감지하는 능력도 인간보다 빠를 것이다. 우리 육안으로 보면 비가 줄기 모양으로 내리는 것 같지만, 카메라의 셔터스피드를 바짝 올려 사진을 찍어보면 빗줄기가 아니라 각각의 빗방울들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벌새의 눈이 그 정도로 빠르다면 벌새가 바라보는 비오는 날의 풍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를 것이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굵은 빗줄기를 이리저리 피해서 나는 벌새들에게, 오늘 같이 부드러운 비가 내리는 날은 빗방울들이 오히려 슬로우모션으로 떨어져 내려, 사방이 황홀한 물방울 작품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새들을 위해 매일 물그릇을 내어놓으면서 관찰해보니, 다른 새들은 대체로 맑고 따뜻한 날씨에 목욕을 하러 왔다. 몸을 잘 씻는 것만큼이나 깃털을 잘 말리는 것이 중요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 날에는 동네 새 목욕탕이 열려서, 물 마시라고 내어놓은 물그릇에 새들이 줄을 서서 목욕을 하고 나간다. 서열이 높은 새들부터 목욕을 하고, 서열이 낮은 새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가족 단위일 경우 두어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한다. 나중에 씻는 새는 앞의 새들의 땟국물이 녹은 물에 목욕을 해야 한다. 새들은 목욕을 하다가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배설을 하기도 한다. 일단 몸을 씻은 새들은 양지바른 곳에서 깃털의 물기를 떨어내고 몸을 말린다. 새들에게 젖은 깃털은 죽음의 위협과 직결되어 있다. 몸이 무거워 잘 날지 못하면 적에게 공격을 당하기 쉽고, 깃털이 젖어 있으면 체온이 떨어져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까.
어쩌면 몸집이 작고 움직임이 빠른 벌새들은 일반적인 새들보다 빨리 털을 말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모든 깃털의 방향을 임의로 움직여 물기를 떨어내는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벌새들이 다 나와서 그 암컷 벌새처럼 춤을 추고 있진 않은 걸 보면, (오히려 나뭇가지 속에 꼭꼭 숨어서 비를 피하다가 잠시 나타나 피더의 넥타만 먹고 사라졌다) 이 암컷 벌새가 특이한 건 맞다.
내 추측이지만, 오늘 빗속에서 목욕을 하는 암컷 벌새는 다른 벌새들과 달리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리면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빗방울에 춤추며 목욕을 해버리는 것이다. 여름이어서 빗방울이 차갑진 않다 해도 깃털을 충분히 말리지 못하면 한기를 느낄 텐데.... 나의 걱정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새는 날개 깃털에서부터 시작해서 평소 한 묶음처럼 접혀 있던 꼬리 깃털까지 활짝 펼쳐 빗방울 세례를 받고 있었다.
암컷 벌새에게는 10개의 꼬리깃털이 숨어 있었고, 생각보다 기다란 꼬리깃털의 끝부분마다 손톱 모양의 하얀 무늬가 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마치 열 개의 검은 손가락을 활짝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날개 깃털도 부채처럼 펼쳐서 빗방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컷 벌새는 이제 수컷 공작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머나먼 거리를 여행하는 철새니까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암컷을 향해 아름다운 꼬리 깃털을 펼치는 숫공작이나 칠면조의 구애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수컷 벌새들은 짝짓기할 때 공작처럼 꼬리깃털을 미학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새는 자주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등을 긁어주는 빗방울의 시원한 느낌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이.
새의 동작에는 어딘가 리듬감이 있었고,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섞어넣으니 완벽한 춤동작으로 바뀌었다. 저 동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기도일까, 향유일까, 춤일까? 새의 몸동작에서 풍겨나오는 느낌으로 볼 때, 불안하거나 추위에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출산을 앞두고 새끼를 안전하게 낳을 수 있도록 기원하며 추는 춤일까? 아니면 장성한 새끼를 독립시킨 후 비로소 자유를 맞아 기뻐하는 걸까? 인간에게만 감정이 있고 고차원적인 의례가 있다고 믿는 건 인간만의 오만이다.
새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고, 아직까지 빗방울이 닿지 않은 다른 부위를 골고루 위쪽으로 드러냈다. 다양한 동작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단 한 명의 관객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벌새의 머리털은 점점 젖어들었다. 벌새가 먼저 멈추고 떠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결국 내가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어쩌면 그 암컷 벌새의 눈에는 신이 보이고, 그 신을 향해 춤추며 재롱을 떠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동작 하나하나를 언어처럼 사용하여, 그동안 이 세상에서 관찰한 모든 것을 신에게 아뢰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이 새는 벌새 세계에서 100년만에 한번씩 태어나는 '빗방울의 여사제'일지도 모른다! 벌새를 알면 알수록 내가 벌새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확실한 건 벌새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벌새를 신으로 섬기고 그들의 시체를 말려서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이듬해에 나는 또 한번 다른 벌새(수컷 벌새-존스노우)가 빗방울에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실 벌새들은 스프링클러나 벌새용 식수대가 있는 곳에서 목욕하기를 즐긴다고 하는데, 우리 집 뒤뜰에는 그런 시설이 없어서 벌새가 목욕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집 뒤뜰에서 목욕을 하려면 이렇게 부드럽고 미지근한 온도의 비가 내려야만 가능하기에, 내가 벌새의 목욕을 관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꼬리가 예쁜 새들 15종
https://www.treehugger.com/birds-spectacularly-fancy-tail-feathers-4864218
*깃털에 대한 모든 것
https://academy.allaboutbirds.org/feathers-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