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통을 바꾼다는 것

벌새와 나의 이야기 10-3

by 최리라

벌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나는 슬슬 벌새 밥통-피더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벌새들이 우리 집 피더만 방문하는 게 아닐테니 다른 집의 크고 화려한 피더를 보다가 우리 집 피더를 보면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지... 그저 벌새가 방문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때가 있었는데...벌새관찰이라는 현실도피의 즐거움도 잠깐, 나는 다시 내면의 냉소적인 목소리와 싸워야 했다.


'이제 벌새가 정말 오게 되었으니 좀더 성의를 보이시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성의가 없어서 되겠는가? 넌 역시 구두쇠 싸구려 인간이야!'


그 목소리를 향해 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난 벌새가 정말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가장 저렴한 플라스틱 피더를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난 언제든 이 모든 살림을 다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유학생 신분이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유학생 신분'은 인생의 메타포가 확실하다. 언젠가 모두 버리고 떠날 인생이라고 해서 매번 싸구려만 쓸 것인가? 그래도 이 피더는 중고가 아니라 새것이었다. 거의 다 얻거나 중고샵에서 산 물건으로 살아가는 유학생 형편에 10달러 넘어가는 비싼 피더가 웬 말이냐 등등... 자꾸 다른 집 넥타통이 눈에 아른거렸다. 요리 선생님인 존 선생님 댁에 가서도 이제 피더 모양만 눈에 들어왔다. 검소하기 짝이 없는 존 선생님이지만 피더는 내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견고해 보였다. 50년째 같은 소파를 쓰는 분 답게, 매년 6개월씩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견고한 것을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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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더에 대한 못마땅함은 나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전이되었고, 이제 우리집 피더를 보고 만질 때마다, 벌새가 그 피더에 식사를 하러 올 때마다 뭔가 모자라 보이고 부끄러운 느낌까지 들기 시작했다. 발받침대도 안 달린 조잡한 꽃모양 구멍에 부리를 넣고 넥타를 빠느라 벌새는 식사 중에도 계속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의자가 없는 식탁에 쪼그려 앉은 채로 밥을 먹는 사람 같았다. 구멍도 5개 이상 있고, 아래쪽에 벌새가 편안하게 앉아서 먹을 수 있도록 플라스틱 받침대가 달린 피더가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그건 한 20달러 가량 했었다. 벌새 피더의 발받침은 결국 의자세트였던 것이고, 의자가 포함된 식탁세트는 두 배로 비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차를 몰고 근처 월마트로 달려갔다.


때는 7월 중순이어서 벌새 피더는 몇 종류 남아있지 않았다. 벌새가 찾아오는 무렵이 3~4월이다보니 그때는 다양한 피더를 구비해두었다가 7월이 넘어가면 남아있는 피더를 할인해서 팔기 시작한다. 빠르면 8월말부터 벌새들이 남쪽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철부지'란 겨울에 여름옷 입고 나가고, 여름에 겨울옷 입고 나가는 어리석은 인간을 일컫는 말이다. 6월 중순부터 피더를 달기 시작했고, 7월에 피더를 개비하려는 나를 보니 난 어디서나 철을 모르는 철부지가 확실했다. 내가 생각한 모양의 발 받침대가 달린 세로형 피더는 다 팔리고 없었다. 대신 나름 고급이라 할 수 있는 가격(그래봤자 15달러)에 우주선 모양으로 동글납작하게 생긴 가로형 피더만 남아 있었다. 상단 뚜껑 부분이 투명한 빨간색이고, 노란 꽃모양으로 장식된 넥타 구멍은 하늘을 향해 뚫려 있었다. 다행히 가장자리에 벌새가 앉을 수 있는 가느다란 플라스틱 지지대들이 붙어 있었고, 흡착판을 이용하여 유리창에 붙일 수도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피더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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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설치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 가로형 피더는 지름이 넓다보니 이전의 세로형 넥타통처럼 스탠드 조명 고리에 걸어두자 공간이 부족해서 비스듬히 기울었다. 어쩔 수 없이 꼬치 요리를 해먹던 스텐레스스틸 스큐어로 가로대를 설치하고, 거기에 고리를 이용해서 스탠드에 걸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기울어졌다. 할 수 없이 흡착판을 이용해서 부엌유리창에 붙이기로 했다. 이런 작은 공사는 부실공사의 대명사인 나보다는 뭐든 꼼꼼히 하는 남편이 제격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닦지 않아 먼지자국으로 쩔은 부엌 창문 바깥을 열심히 닦았고, 남편이 수평을 잘 맞추어 유리창 바깥면에 부착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제 유리창 피더에서 식사하는 새들의 모습을 나는 편안히 식탁에 앉은 채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나처럼 길치 벌새가 있을까 싶어서 이전의 세로형 피더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걸어두었다. 피더가 두 군데이니까 이제 더 많은 벌새들이 동시에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오후 새들이 새로운 피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읽을 책을 가져와서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새들이 오긴 했지만 여전히 기존의 세로형 피더를 선호하는 게 보였다. 유리창이 상대적으로 나와 가깝다보니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유리창이 상단과 하단으로 분리되어 있고, 하단의 창을 위창문과 겹치게 올려야 열 수 있는 방식이다보니, 상단에 달린 벌새 피더를 건드릴까봐 창문을 열기 불편했다. 다음날 아침, 구멍이 세 개인 세로형 피더에 세 마리의 벌새가 붙어 식사를 하자 네 번째 벌새부터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피더에 와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벌새를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된 희열도 잠깐, 역광이다보니 그늘이 져서 벌새의 아름다운 깃털색을 즐길 수 없었다. 암컷이나 수컷이나 다 축소된 진회색 비둘기로 보였다. 그대로 두고 벌새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기다리지 못하고 새로운 피더를 창문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토마토벤치'로 옮겨 걸었다. 그곳은 오전 동안은 햇빛이 들어서 벌새의 온몸이 반짝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며칠 지켜보니 어쩐지 싸구려 세로형 넥타통보다 이 고급 가로형 넥타통이 인기가 덜 한 것 같았다. 세로형 넥타통은 꽃술 구멍 부분까지 설탕물이 차오르고, 그러다 못해 아래로 뚝뚝 떨어져내리기까지 해서 사람들이 보기엔 설탕물 낭비가 심하고 그 구멍에 온갖 나비와 말벌, 개미까지 달라붙어 골치였는데도 말이다. 그에 비해 가로형 넥타통은 넥타가 아래쪽에 안전하게 고여있어 위생적이고 혀가 길지 않은 곤충들은 먹기 힘들다는 장점이 있다. 가만히 벌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세로형 피더는 그냥 구멍에 혀를 갖다대기만 해도 설탕물이 나와서 편리한 데다, 먹으면서도 날갯짓을 하고 있으니 적이 나타날 때 언제든 공격하거나 도망치기 좋았을 것이다. 반면 가로형 넥타통은 날면서 먹으려면 머리를 앞으로 숙여야 해서 목이 아프고, 발판에 앉아서 먹자니 적을 발견했을 때 날아오르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추측이지만, 결과적으로 세로형 넥타통이 더 인기가 좋았던 건 확실하다. 그래도 나는 일단 벌새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당분간 세로형 넥타통을 내놓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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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시간을 두고 관찰해보니 가로형 넥타통의 심각한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가로형 넥타통이 설탕물이 새지 않아 위생적이고 좋았는데, 비가 오면 가로형 넥타통에 빗물이 흘러 들어가서 넥타가 희석되는 것이다! 우리집 피더의 장점은 다른 집 피더보다 더 당도가 높은 33% 설탕물이라는 건데, 그게 물과 섞이면 큰일이다. 반면, 세로형 넥타통은 평소에 설탕물이 옆쪽으로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떨어져 내려서 아래쪽에 개미가 꼬인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관점에서 불편한 점이고, 벌새에게는 당도 높은 넥타를 계속 먹을 수 있다는 확실한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빗물로 가득찬 가로형 넥타통을 갈아주다가 새들이 어쩌는지 보려고 스탠드에 세로형 넥타통을 다시 걸어두었다. 그러기 무섭게 존스노우는 당장 가로형 넥타통을 뒤로 하고 세로형 넥타통에만 달려든다. 다른 암컷들도 부리를 내밀며 이 세로형 넥타통을 향해 날아오는데 존스노우의 지나친 방어태세에 한 입도 못 빨고 도망을 친다. 세로형 넥타통을 지키려는 존스노우의 집착은 가로형 넥타통에 대한 것보다 훨씬 강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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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를 길들이려 했던 나의 교만을 반성하며, 그날부터 나는 가로형과 세로형 두 개를 동시에 걸어두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세로형 넥타가 걸린 스탠드가 비바람에 쓰러지기 일쑤여서, 가로형 넥타를 부엌 현관 창문 앞 처마 밑으로 옮겨주었다. 그런 날에는 벌새들도 저항 없이 처마 밑에 달린 가로형 넥타에 찾아와서 안전하게 비를 피하며 식사를 했다. 두 피더의 진정한 장점은 벌새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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