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그네

벌새와 나의 이야기 10-9

by 최리라

가끔은 벌새를 통해 나의 욕망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과정을 돌아보기도 했다. 처음엔 그냥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Ruby-throated hummingbird)'가 우리집 피더에 나타나기만을 바랐는데, 얼마 후엔 암컷들 말고 목에 루비빛 반짝이 깃털이 달린 수컷이 찾아오길 바랐다. 수컷 벌새가 마침내 찾아오자 이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수컷 벌새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사진을 찍기 원했다. (물론 여기서 카메라 장비와 렌즈에 대한 욕망이 곁가지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수컷 벌새의 사진을 찍다보니 벌새가 플라스틱 피더에서 꿀을 빨고 있는 장면이 아니라 진짜 꽃에서 꿀을 빠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졌다. 그래서 뜨거운 조지아의 여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마다 근처 보태니컬 가든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벌새 사진을 찍었다.


그것까지 하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이번엔 우리 동네에는 찾아오지 않는 다른 종류의 멋지고 화려한 벌새들을 보고 싶어졌다. 사실 북미대륙을 세로로 길게 잘랐을 때, 오른편으로는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 한 종류밖에 찾아오지 않았고, 왼쪽편 중앙에서부터 서쪽 해안까지는 다채로운 종류의 허밍버드들이 찾아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다른 종류의 허밍버드를 관찰하려면 텍사스까지 내려가거나 아니면 캘리포니아쪽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벌새에 빠져들 무렵은, 유학자금이 다 떨어져서 한국에 남아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던 유학말년 시절이었으므로 고작 벌새를 보자고 서쪽까지 여행을 떠날 형편이 못 되었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나의 블로그 친구 눈바람꽃님이 찍은 사진을 통해 애나스 허밍버드, 루포스 허밍버드, 블랙친드 허밍버드, 알렌스 허밍버드, 코스타스 허밍버드 등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핀터레스트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각종 아름다운 벌새 사진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벌새에 빠지기 전에도 이미 8년 가량 버드와처(birdwatcher)로 지내왔고, 각종 아름다운 새들을 보며 '아 정말 신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벌새들을 바라보니 그런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이건 물론 꽃, 곤충, 어류 등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관찰할 때도 드는 생각이었지만...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인간이 만든 벌새그네에 벌새가 앉아 있는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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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그네에 벌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벌새만큼 인간이 만든 것을 사랑하고 편견없이 이용해주는 새가 또 있을까? 그 사진이 너무 신기했고, 그 정도 그네라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과연 우리집 벌새들도 내가 만든 그네에 앉아줄지는 의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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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본 벌새그네들은 거의 다 벌새들이 쉬면서 망을 볼 수 있는 용도이자, 그 모습을 인간이 관상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용도를 약간 변경하기로 했다. 보태니컬 가든을 돌면서 관찰하다보니, 벌새들이 꽃의 꿀을 빨 때 약간이라도 아래쪽에 의지할 나뭇가지나 꽃이 있으면 그걸 딛고서 꿀을 빠는 걸 볼 수 있었다. 벌새들은 너무나 가볍기에 얇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도 가지가 꺾이지 않았다. 아무리 원기왕성한 벌새라 하더라도 혀를 뻗어 꽃꿀을 빨아먹으면서 동시에 날개를 빨리 저어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무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착안해서 나는 벌새들이 우리집 피더를 방문할 때 편안히 발을 딛고 날개를 접은 채로 식사할 수 있도록 그네이자 식탁의 용도를 지닌 벌새그네를 만들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 돈은 한푼도 들이지 않았다. 집에 남아도는 꼬치구이용 대나무와 이전에 귀걸이를 만들다가 남은 투명 구슬들과 와이어를 엮어서 대충 만들었다. 벌새피더 바로 앞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네를 걸어둔 다음, 벌새들이 과연 나의 설명 없이도 그네겸 식탁을 올바로 이용해줄지 궁금해하며 부엌유리창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2F2A6527-best.JPG 나의 벌새 '존스노우'가 피더 앞에 걸린 그네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


그네를 건 지 3분도 안 되어 존스노우가 나타난 걸로 봐서, 건너편 나뭇가지 속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존스노우는 관찰하듯 천천히 피더를 향해 날아오더니 그네에 착지해서 균형을 잡았다. 이런 그네가 처음이 아닌 건지, 아니면 자연 속에 있는 다른 가지나 물체를 많이 활용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존스노우는 피더의 넥타 구멍과 자기 발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편안하게 앉아서 넥타를 먹었다. 존스노우가 식사를 마치고 떠난 후 나타난 암컷 레나와 베이비소울도 모두 자연스럽게 그네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네에 매달아둔 투명한 플라스틱 구슬이 꽃인 줄 알고 유심히 살피고 냄새를 맡다가 혀를 내밀어 핥아보기까지 했다.

2F2A6915-g.JPG 그네에 발을 올리고 날개를 접은 채 넥타를 먹는 존스노우
2F2A6547-best-1.jpg 수컷보다 몸이 약간 큰 암컷 레나는 그네를 살짝 뒤로 밀면서 부리를 뻗어 넥타를 먹는다.


빨간 구슬이 의외로 얼마 남지 않아서 이것저것 엮다보니 엉성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의 소박한 벌새들은 그네형 식탁(또는 식탁형 그네)이 마음에 드는지 모두 편히 앉아서 넥타를 먹었다. 내가 만든 넥타를 잘 먹어주는 모습만 봐도 머릿속에서 엔돌핀이 분비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만든 볼품없는 그네에 앉아 넥타를 먹는 모습을 보니 사랑스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날이 8월 29일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아침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을이 온다는 건, 9월이 온다는 건 벌새들이 남쪽으로 떠날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었다. 좀더 빨리 그네를 만들어주었더라면 새들이 일찍부터 편하게 식사를 했을 텐데... 존스노우는 9월 중순이 되어서 떠났으니, 벌새그네를 이용한 날은 고작 보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착각이었는지 몰라도, 그네가 생긴 후 존스노우는 좀더 나를 자주 바라봐주었던 것 같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존스노우의 눈길은 내게 꿀처럼 달콤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존스노우와 나의 벌새그네를 보니, 존스노우의 생명력 덕분인지 조잡한 구슬들이 진짜 보석마냥 영롱하다.


2F2A6838-best-1.jpg 나와 눈을 맞추는 존스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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