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10-17
아즈텍인들은 허밍버드들을 환생한 전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에서도 계속 싸우는 거라고 믿었다. 그들이 섬기던 '전쟁의 신' 이름이 Huitzilopochtli인데, "허밍버드'와 "불을 내뿜는 마법사sorcerer who spits fire"를 합성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 허밍버드의 부리와 날개를 가졌으면서 입에서 불을 내뿜는 능력을 가진 마법사인가보다. 하긴, 허밍버드의 몸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커도, 모든 생명체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작으니 참 다행이다. 아니 너무 작으니까 그처럼 독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프랑스의 박물학자 조지 루이 레클러(Georges-Louis Leclerc)는 1775년 "벌새는 결코 땅의 흙에 발을 더럽힌 적이 없는 존재"라고 쓸 정도로 벌새를 숭고하고 아름답게 바라보았다. 벌새가 한여름의 화려한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장미꽃에 고인 아침 이슬에서 목욕하는 장면만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팅커벨을 떠올릴 것이다.
최근에 나타난 두 꽃미남 청소년 벌새 '다리오'와 '댄디'가 하루 종일 우아하게, 그러나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영화 '트로이(Troy)'를 떠올렸다. 영화 속에서 아킬레스로 분한 브랫 핏과 헥토르로 분한 에릭 바나가 힘을 겨루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인데, 재미있는 건, 당시(2004년) 그 영화의 각본을 쓴 데이빗 베니오프가 2011년 '왕좌의 게임'도 썼다는 점이다.(그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를 맡았던 숀빈은 왕좌의 게임에도 등장한다.) '왕좌의 게임'에는 다리오를 비롯해서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전사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시즌 후반으로 가는 동안 전사하지만 말이다. 내가 '왕좌의 게임'을 안 봤더라면 이 잘 생긴 벌새들의 이름을 '아킬레스'와 '헥토르'로 지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벌새 다리오와 댄디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어떤 벌새들보다(심지어 나의 존스노우보다) 아름다웠고, 그러면서도 용맹했다. 아즈텍인들이 말한 '전쟁의 신'이면서 조지 루이 레클러가 말한 '흙에 발을 더럽힌 적이 없는 존재'란 바로 다리오와 댄디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영화 '트로이'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난 사실 헥토르를 맡은 에릭 바나의 팬이었다), 누가 이기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들이 힘이 비등해서 오랫동안 싸우기를, 그래서 그 모습을 최대한 즐길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나의 걱정과 달리 그날 저녁 두 벌새는 번갈아 피더에 나타나 오랫동안 넥타를 먹고 잠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그 대결이 어느 한쪽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음날이 되면 둘 중 하나는 사라지리라고 예감했다.
조금 찬바람이 불었던 다음날 아침, 전날 그렇게 많이 보이던 벌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댄디, 스톤, 다리오, 레나까지 모두 남쪽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전날 저녁의 치열한 싸움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배를 불려보려던 몸부림이었나 보다. 그래도 어디 먼 곳에 새로운 꽃이 피었거나 피더가 늘어서 그리로 먹이 사냥을 갔거나, 스프링클러가 있는 집에 목욕을 갔겠거니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몇 장 찍어둔 사진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어제도 오늘도 벌새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나그네 벌새 두어 마리가 날아와 여유롭게 양쪽의 넥타통에서 식사를 하고 둘이서만 잠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습과 행동을 보니 지금까지 보던 벌새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중 한 마리는 사진을 찍어서 확대해보니, 왼쪽 발목에 작은 금속 밴드를 차고 있었다. 지금까지 금속밴드를 찬 벌새는 본 적이 없었다. 아직은 내 피더에서 식사하는 벌새가 있다는 점에 안도하면서도, 그동안 존스노우가 떠난 후 빈자리를 채워주던, 어쩌면 존스노우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청소년 벌새들이 그리워졌다. 어느새 그들은 존스노우의 대체물이 아니라 나의 순수한 애정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두 인사도 없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확실히 차가워진 새벽공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그 주 일요일날 교회에 갔더니, 70세인 린다 아줌마께서 시무룩한 얼굴로 벌새 이야기를 꺼내셨다. 전원주택에 사는 린다 아줌마의 집에는 며칠 전부터 벌새가 완전히 사라져서 아예 넥타통을 떼어버렸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네 페북을 보니까, 너희집에만 온갖 예쁜 벌새들이 찾아오더라!" 하신다. 나는 우리집에만 벌새가 줄어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우리집에는 아직까지 두어 마리라도 방문해주는 게 행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온갖 꽃들이 피어 있는 스테이트 보태니컬 가든에 가면 허밍버드들을 구경할 수 있겠지 생각하고, 오후에 spotting을 잘 하는 남편을 끌고 그곳으로 갔다. 벌새들이 좋아할 만한 꽃들이 사방에 피어 있었으나, 벌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게 늘어난 건 벌들이었다. 벌새들이 윙윙대던 자리에는 벌들이 붕붕거리고 있었다. 아니면 사람을 겁내지 않는 대담한 나비들만 눈에 띄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래도 뒤뜰의 넥타통에서 벌새 한 마리가 넥타를 먹고 있었다. 보물을 찾아 먼 곳을 헤매다 왔더니, 보물은 우리 집 뒷마당에 있더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새를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어두었다. 사진을 찍어서 보니, 며칠 전 댄디와 격투를 벌이던, 스톤과 닮았으나 스톤과 달리 이마에 송진 같은 게 묻어있던 그 새였다. 나는 이 녀석을 '차돌'이로 이름붙이기로 했다. 차돌이 말고 사진에 찍힌 암컷은 '엄지'로 부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관찰해본 결과, 날씨 변화가 근본적인 요인이긴 하겠지만, 추워서라기보다는 먼저 북쪽으로부터 철새 이동을 시작한 새들이 몰려와서 먹이경쟁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철새이동을 부추기는 것 같다. 즉, 웬만하면 현재의 먹이통에 집착하며 머무르고자 하나, 북쪽에서 내려온 벌새들이 사납게 덤벼들면서 스트레스를 주면 그것 때문에 더이상 버티느니 떠나는 게 낫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존스노우도 아직 날씨가 좋을 때에 일대 다수로 며칠 간 전투를 벌인 후에 사라져버렸고, 다리오도 댄디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차돌이에게도 곧 떠나야 할 이유가 생기겠지...
벌새들과의 만남에는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사실상 마찬가지겠지만....내일도 다시 볼 것처럼 가볍게 안녕이라 말하고 헤어지지만, 알고 보면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 벌새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지금까지 내가 미국의 캠퍼스타운에서 정들었다가 떠나보낸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