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10-18
10월이 가까워오면서 아침엔 제법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다. 새로운 방문객인 엄지와 차돌이가 며칠 더 머물러주긴 하지만, 오전에 몸을 동그랗게 부풀리고 넥타를 먹는 걸 보니 그들도 곧 떠날 것이 분명하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눈바람꽃님 블로그에 올라오는 캘리포니아의 벌새 사진을 보고 여행 계획을 잡아보거나, 인터넷을 뒤져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의 흔적을 더듬었다. 일교차는 크지만 낮에는 꽤 더운 가을 날씨 때문에 내가 살던 조지아주보다 북쪽인 캐나다, 뉴욕, 인디애나 지역에서 여전히 루비뜨로티드 허밍버드가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9월 말이나 10월초까지는 벌새들을 더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내 상태는 금단증상, 빈둥지증후군, 실연상태와 비슷했다.
벌새들이 철새 이동(migration)을 준비하는 시기에는 갑자기 넥타 피더 방문 횟수가 늘어나고 자기들끼리 싸움도 치열해지는데, 이때의 과도하게 자주 먹는 현상을 '이상 식욕 항진증(hyperphagia)'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몸무게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 위한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한다. 인간이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 좀 큰 트렁크에 짐을 채워넣는다면, 벌새들은 몸속에 지방과 단백질을 잔뜩 쌓는 것이다. 먹이가 충분히 남아 있고, 경쟁이 없다고 해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중요한 단백질원인 곤충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탄수화물만 먹고는 살 수 없듯이, 벌새들도 설탕물 말고 곤충도 먹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많은 새들이 갑자기 사라지기 전날 저녁에 목격한 장면이 떠올랐다. 보통 벌새들은 일몰시간을 기준으로 10분 후 정도까지 넥타를 먹고 퇴근하는데, 그날 저녁에는 유난히 오랫동안 넥타들을 먹고, 어두워진 후에도 한번씩 더 먹으러 왔다. 그 중 두어 마리는 넥타를 다 먹고 나서 위쪽의 스텐레스 스틸 스큐어 위에 잠시 앉으려다가, 스큐어에 목부분이 받혀 스스로 당황하며 날아가 버렸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평소의 날갯짓만으로는 스텐레스 스큐어 위까지 떠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마리나 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새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보통 수컷들이 먼저 떠나고, 그 다음엔 암컷들과 청소년들이 떠나고, 마지막에 떠나는 건 거의 경험 없는 청소년들이라는데, 이 어린 새들은 대체로 첫해의 마이그레이션 중에 많이 죽는다고 했다. 새끼 시절 포식자들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남은 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름을 지어 주었던 수많은 청소년 새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 새들은 스톤과 댄디였다. 스톤은 지혜롭고, 댄디는 용맹했다. 내년 봄에 돌아오는 새들은 과연 누구일까?
최근에는 차돌이가 아닌 엄지가 나의 넥타통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지가 두 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장면에서 금속으로 된 식별밴드를 발견했다. 00이라는 숫자 정도만 보이는데, 어떤 연구기관을 통해 위치 추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연구소에 찍힌 하나의 점이 우리집 뒤뜰이 되다니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엄지는 어디서부터 날아온 걸까? 캐나다일까 뉴욕일까 아니면 이 근처의 조지아 대학일까?
그날 저녁이 되자 엄지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다. 토마토 지지대 위에 앉아 있다가 눈앞의 넥타통으로 가서 10초 가량 넥타를 먹고 다시 토마토 지지대로 돌아갔다가, 1분도 안 지나서 다시 넥타를 먹으러 가고 되돌아가는 행동을 꽤 오랫동안 반복했다. 마치...뭐랄까...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아쉬운 마음에 연인에게 키스를 하고 또 하고...이런 느낌이랄까? 심지어 닥터지바고와 라라의 이별 장면도 떠오르고... 그래서 나는 예감했다. 아, 엄지가 내일 아침에 떠나려나보다, 라고. 한참 동안 그렇게 넥타통과 키스를 주고받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뒤돌아보지 않고 나무 속 은신처로 날아갔다.
얼마 전 보았던 영국 드라마 '핼리팩스에서의 마지막 댄스(Last Dance in Halifax)'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이 아내에게 "Our love ran its course(우리 사랑은 이제 수명이 다했어)"라고 말하며 이별을 통보했다. 배웠다는 남자의 비겁한 변명이었지만, 사랑이 끝난 것을 '정해진 코스를 모두 다 돌았다'는 뜻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듯이, 까맣게 타버린 사랑의 불씨도 되살릴 수 없다.
다음날 아침 토마토 지지대에는 엄지도 차돌이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가끔씩 넥타통에 들리는 나그네 새들이 있었지만, 어떤 새도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그해 뒤뜰에서 마지막으로 벌새를 본 것은 10월 10일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