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리 May 09. 2018

표지

내면의 언어

프로미스타까지는 25킬로미터의 여정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고 상쾌한 공기를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돌무더기 위에 표시된 작은 가리비를 보고 멀리 있는 높은 산을 향해 걸었다. 노란색 화살표를 여러 개를 이정표 삼아 걷다 보니 어느덧 산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메마르고 건조한 땅의 초입에 드러 섰다. 바닥에 돌로 대충 그어 놓은 듯한 화살표를 보고 또다시 한 시간쯤 걸으니 건조한 땅은 이내 아름다운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숲으로 변해있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순례자들은 표지를 찾는다. 가리비 껍데기, 노란 화살표, 신호 표지판, 나뭇가지, 여러 개의 돌무리 그 모든 것이 신호이자 방향이다. 천 년 전에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난 프랑스 사제 에임리 피코는 그가 쓴 가이드에서 순례길을 따라 걸으며 알아볼 수 있는 자연의 표지들을 열거해 놓았고, 피코의 주해에 기반을 둔 수도회에서는 이 자연 지표들을 보존해 순례자들을 이끌어 준다.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순례자들은 표지라는 존재로 오늘날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는 표지와 함께 11세기 피코가 콤포스텔라 길에 올랐을 때부터 존재해 왔던 낡은 교회당이 보였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교회당은 새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교회당을 주변에서 지키고 있는 플라타너스는 앙상하고 굵은 나뭇가지를 드러낸 채 서있었다. 이미 월동준비를 끝마친 것 같았다. 나는 교회당 앞 작은 계단에 앉아 삶에도 눈에 보이는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천 년 전 수도자들은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이 길을 걸으며 표지를 만든 것일까.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온 것일까. 


나는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에는 마음에 소리에 귀 기울이려 노력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안에 집중하면 진흙으로 뒤덮여 잘 보이지 않았던 마음의 소리가 영롱한 진주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랬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라고. 내면의 소리는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나만의 가리비고 나만의 노란 화살표이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결국 가장 중요한 존재는 외부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내면의 소리는 나에게 가장 가까우니 결국 신이 이야기하는 가장 커다란 소리인 것이다. 나 외에 다른 모든 것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말해줄 때 가장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는 삶의 표지이다. 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면 우린 스스로 삶의 방향을 잡아 높은 산을 넘고 메마른 대지를 지나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숲을 향해 가다 결국 목표한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의지요, 목적이다. 나는 진리를 위한 나의 운명과 임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갈 것이다. 신은 앎과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타오르는 횃불을 그대의 마음속에 넣어 주었다. 

- 칼릴 지브란 <아홉 가지 슬픔에 관한 명상> 
콤포스텔라위의 표지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은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