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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리 Mar 11. 2018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내면 바라보기.

빛바랜 일기장을 책장에서 꺼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나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나에게 스무 살은 어떤 의미였을까를 돌이켜 보며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다. 


나의 이십 대는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유리 내면을 부시고 다시 단단히 만들어 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나을 수 있도록, 내일이 더 멋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사랑에 아파하고 슬퍼했으며 행복했던 날들보다 눈물 흘리고 힘들어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자존감은 바닥이었으며 질투로 눈이 멀기도 했고 무기력했다. 고독했으며 우울했고 조금만 만져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기도를 할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필요하다면, 더 큰 시련을 내려 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잊고 있었다. 나에게 이토록 힘든 시기가 있었는지.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십 대 초반은 나의 인생의 나침반 같은 가치관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었다.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에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과정을 항상 관찰과 성찰로 이루어 지고 있음을 느낀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장소에 가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고, 책을 읽고, 사랑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는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종의 현상이다. 나에게는 이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러한 관찰은 혼자서 조용히 앉아있거나,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나른한 오후 햇볕을 쬘 때, 저녁에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거나, 한 손을 머리에 괸 채 운전을 하거나, 텃밭에서 흙을 만지며 육체노동을 할 때 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바라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을 내 바깥으로 꺼내어 덤덤히 관찰하는 것이다. 어떠한 판단과 비판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했던 행동이나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자세하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작은 나’를 마주하게 된다. 


화, 슬픔, 기쁨, 부끄러움, 뿌듯함, 적적함, 고독함 등의 감정이 나를 덮치는 건 순식간이다. 쑥스럽고 창피한 마음에 손발이 오그라 들기도 한다. 다양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감정들까지도 덤덤히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관찰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의 파도까지도 겪고 나면 운동장을 열 바퀴 뛴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리고 조금씩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반짝이는 순간이 다가온다.


‘아. 두려움이었구나’ 


내가 했던 말과 행동에 뿌리는 늘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 잃을까 봐,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초조해했다. 사람들이 혹여나를 오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무서워하는 감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 기초된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내일 혹시 필요할까 두려워 움켜쥐고 지키고 싶었던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나 권력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무엇인가가 나의 필요에 모자랄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자람이라는 것을 아는 건 순식간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혹은 저 넓은 대지의 흙 속으로, 공기 중으로, 저 멀리 우주의 한가운데로 말이다. 기쁠 때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내가 행복에 겨워 웃음 지었던 순간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사실 나에게 기쁨을 주던 그 무엇이 사실 나에게 슬픔을 주었던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슬플 때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또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 무엇 때문에 내가 눈물짓고 있음을 다시금 알게 된다. 사실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변화도 다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싶었던 마음속에 넣어 두고 싶었던 무언가에 대한 욕심과 기대로부터 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라보고, 관찰하고, 느끼고, 깨닫고 나면 행동이다. 매 순간순간을 의식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매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행동 또한 변화한다. 닫혀있고, 닫아걸고, 조이던, 소유하려 하던 모든 에너지는 어느새 열어주고, 받아들이고, 보듬어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행동하게 된다. 


마지막은 ‘공감’이다. 나 스스로를 공감하고 다독여 주기 시작하면, 내 주변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누군가가 느끼는 아픔에 대해, 분노에 대해, 두려움에 대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가슴으로 공감한다. 인간도 결국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고 느껴지기 시작하면 내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연민이라는 감정이 느껴진다. 들판 위에 우뚝 서있는 나무에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화분 속 식물에게, 흙 속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지렁이에게, 부엌 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의 꿀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는 개미에게, 처마에 둥지를 튼 채 살아가는 말벌에게, 얼마 전 옮겨 심은 토마토 옆에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잡초에게, 씨앗을 훔쳐먹고 달아난 쥐에게, 텃밭에 작은 새를 무참히 살해한 옆집 고양이에게. 그 모두에게 말이다. 


내면을 마주하는 작은 일이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20대의 시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기도했던 것처럼 나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한 더 큰 시련을 선물로 받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는 덤으로 받았다. 


영적인 삶이라는 거 스님, 성직자, 철학가들만이 할 수 있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가 내면을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어 당신 생명의 그 깊은 근원을 느끼도록 하세요.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 마음의 깊은 느낌을 통해서만 대답을 구할 수 있는 의무에 대해 당신 바깥의 외부로부터 그 대답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만큼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 -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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