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언제나 험난하지.
모태신앙이었지만, 성당을 가는 걸 즐긴 적은 없었다.
다만, 군대 시절 처음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 종교에서 위안을 얻곤 했는데, 신부님이 미사 끝나고 주는 간식(빵+음료수) 때문에 성당을 오는 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하시며 간식을 끊어버리셔서 내 위안도 간식과 함께 끊겼고, 난 성당을 끊었다. 잘못된 정책으로 신자 수가 급감하자 신부님은 다시 간식을 주셨지만, 나는 이미 더 퀄리티 좋은 밥을 주는 교회와 밥+만화책이 있는 불교를 경험하였고, 계급도 더 높아져서 예전처럼 믿음이 절실하지 않았다. 기불릭이라는 신흥 종교의 수장으로서 후임들을 데리고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종교시설들을 다닐 뿐이었다.
결혼도 성당에서 하였고, 그것을 위해 아내는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다.(나와 결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우도 유아세례를 받았다. 대부는 동생이 해주었는데 대부의 필수 자격인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끊었던 성당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여 그곳에서 제수씨를 만나 결혼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인 나는 정작 그리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생이 첫째를 낳았을 때 내가 대부를 서 줘야 할 거 같아 넌지시 얘기했는데, 동생은 믿음이 부족한 대부를 거절하였다. 나는 조카의 대부가 못 된다는 아쉬움 1/3, 성당을 안 가도 된다는 기쁨 2/3로 그 거절을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종교적인 가치관이 기본이 되면 좋다고 말씀하셨고, 나 또한 경험한 바가 있어서 연우를 성당에 보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연우만 보낼 수는 없고, 나도 같이 가야 해서 계속 미루고 있었다.
연우가 3학년이 됐을 때, 마침 연우와 친한 친구가 성당을 다녔고, 그 친구의 엄마가 교리 선생님이어서 연우도 첫 영성체를 함께 하지 않겠냐고 권유하였다. 연우가 성당을 좋아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다행히 연우는 기도도 2등으로 빨리 외우고, 성경 필사도 잘하여서 첫 영성체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또, 동갑인 친구들이 많아서인지 성당에도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반면, 아내는 가기 싫어하는 나를 끌고 매주 성당에 갔다.
나는 어릴 때는 엄마 때문에 성당을 갔는데, 커서도 (연우) 엄마 때문에 성당을 간다고 툴툴거렸다.
성당에는 복사라고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실 때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어린 시절 복사를 하였다. 자랑스러운 기억 아니냐고 하겠지만, 부끄러운 이유는 몇 년 하다가 잘렸기 때문이다. 잘린 이유는 능히 짐작이 가는 바였지만, 어린 마음에는 충격이 컸었고 차마 집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복사단에서 회의를 하고 온 것처럼 시간을 때워야 했기에 몇 주 간 오락실을 전전했었다. 결국 들통이 났는지 오락실에서 삼촌에게 검거당해 현행범으로 가족들에게 끌려갔는데, 잘린 걸 말할 수 없었다며 펑펑 우는 내가 불쌍했던지 크게 혼나지 않고 넘어간 기억이 있다. IMF가 오기도 전에 해고자의 슬픔을 미리 겪은 나에게 그 원인을 제공한 성당이지만 희한하게 나쁜 기억 없이 애정이 남아있다. (사실 원인은 나였지만...)
여튼, 첫영성체를 마친 연우는 친구들과 함께 복사를 해보겠다고 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응원해줬지만, 복사의 길은 쉽지 않았다. 한 달간 매주 3번씩 미사에 나가야 하고, 부모님이 꼭 같이 참석해야 했다. 때마침 아내가 일을 시작하여 평일 저녁 미사는 내가 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성탄절까지 한 번의 결석 없이 성당을 열심히 다녀야 복사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성당 가는 날은 야근, 회식, 감사 등이 없기를 바라며 평일 미사에 나가고 있다.
의도치 않게 독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나보다 더 신앙심이 깊은듯한 연우를 보면서, 아빠와 같은 아픔은 겪질 않길 바라고 있다. 아마 하는 거 보면 나 같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