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 속으로 걸어온 아이

by 도비

지난밤 저녁식사 후 마신 커피가 잠을 죽이는 약이 되었는지

말똥말똥한 정신은 도저히 잠이 들 기색이 없다.

잠들지 못하는 밤..

봄바람에 꽃잎 날리듯 온갖 상상들이 난분분한 밤...

새벽의 시간이 다가와 어지러운 그들을 밀어낼 때쯤 나는 주섬주섬 바구니를 챙겨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 나선다.

이른 새벽의 수영장은 물소리마저 고요하다.

라인 하나 차지하고 찰박찰박 천천히 몸 깨우면서 느긋하게 헤엄쳐 나오니 어느새 머릿속은 맑아지고, 싱그러운 아침공기는 상큼하게 나를 맞는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

온천마을에서 달집 태우는 날이다.


온천의 족욕탕옆 너른 마당에서는

해마다 달집 태우기를 한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농촌의 특성상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젊었든 사람들은 늙어가니

행사를 치를 인력은 해마다 부족하여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오늘 그 손길 잡고 달집 태우는 그곳으로 나간다.


계속된 봄맞이 비로 인해 행사의 진로는 갈림길에 서 있었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는단다.

냉랭한 정월보름 추위에 겨울 못지않게 손 시린 날..

서로 맡은 자리 지키며 준비하는데

한 사람 두 사람 달집을 향한 발길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부럼을 먹으며 마음속에 품은

제각각의 소원을 적어 달집 속에 묶는다.


내가 맡은 부스는 연날리기다.

너무 추운 날씨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발길이 뜸하여,

하나... 둘...

하늘 위 외로운 날개 짓 하는 연이 점심시간을 지나고 달집 태우는 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하늘 높이 꼬리 흔들며 나비연 독수리연 다투어 날아오른다.

나는 연 만드는 것을 도와주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고 있는 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연 날리기 참 좋은 날이네."


연으로 가득 채운 하늘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듯하다.

바람 적당히 불어주자 연은 꼬리를 흔들며 마구 높이 서로 높이 올라간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빡 상기된 얼굴로 하늘 보며 큰 소리로 웃는다.

웃음소리가 높이 날아오르자

하늘도 즐거워서 꺄르르르 웃는다.


시끌시끌 어둠이 찾아오자 연은 꼬리 내리기 시작하고 하늘을 날고 있는 웃음소리 잦아지면서, 사람들은 달집으로 몰려든다,


달집을 태우는 점화식이 울리자 순식간에 불길은 붉은 꽃으로 몸 열며 하늘로 높이 치솟는다.

"와~ "

터지는 함성 속에 두 손 모으는 간절한 마음 엿보는데, 기운차게 타오르는 붉은 달집 속에서 나누는 덕담들도 불꽃처럼 뜨겁게 웅성웅성 퍼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바람처럼 빠져나간 자리에서, 숯불로 반짝이며 타고 있는 아름다운 달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긴 머리의 날씬한 아가씨가 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도자기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선생님께 도자기체험 했었어요."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여린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얼굴이다,

"어머나.. 그래요?"

"근데 내가 기억이 잘 안나네...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해..."

"선생님은 더 예뻐지셨어요."

높낮이 없는 여린 목소리

"어머 고마워라. 할머니한테 이뻐졌다는 인사는 최고의 찬사지!"

웃으며 주고받는 말에 끼어들며 누군가 아는 체한다.

"너 월촌 00사 00 아니냐?"

"예 맞아요." 대답하더니

"선생님! 우리 품바 보러 가요."

"저는 품바 보면서 춤추는 거 좋아해요."

아가씨는 이해할 수 없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가더니 품바 보러 간다며 긴 머리를 나붓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져 가는 모습 뒤로 하고 달집 속에서 이글거리는 잔불 마주하며

"아까 그 아가씨 잘 알아요?"

"아가씨는 무슨 그 얘 남잔데요?"

"네.....?"


또박또박 높낮이 없는 느리고 여린 그 말투!

그제야 생각이 났다.

'천주산 진달래 축제!'


벚꽃 잎 하늘하늘 나리기 시작하고 목련꽃 뚝뚝 떨어질 즈음이면 천주산은 진달래가 만개하면서 그 큰 산이 온통 진달래빛으로 물든다. 이때에 맞춰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데

축제기간 동안 나는 천주산의 넓은 공터(지금은 야영장을 겸한 차박 캠핑장으로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에 만들어진 부스에 앉아 후루루룩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연분홍빛 꽃비를 맞으며 아이들과 만들기 체험을 했었다.

해마다 하는 행사였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꽃잎처럼 하늘하늘 뛰어오는 가냘픈 아이!

"선생님 저 체험하고 싶어요."

해마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부지런한 아이!

"오늘은 뭐 만들어요?"

먼저 와서 반기며 친구 해 주는 조용한 아이!


이런저런 이유로 축제가 취소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축제여 참여하지 않게 된 후,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그 아이 생각이 나곤 했었다.

'올해도 아이는 그곳에 왔을까?'

'나 없어서 혹여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잘 지냈어?"

"진달래 필 때 천주산에는 계속 갔었어?"

아이인 줄 알았더라면 궁금했든 안부를 전했을 텐데...


십여 년...

시간의 강을 건너 어둠의 불빛 속에서 나를 알아보고, 반가움의 말 건네는, 이제는 긴 머리의 청년이 된 영특한 눈매의 그 아이와 못다 한 이야기는 월촌의 그곳으로 찾아가 나붓나붓 나누어야지.


"못 알아봐서 미안해."

"진달래가 피면 네가 생각났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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