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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인치 TV

by 자작가 JaJaKa

TV를 샀다. 한 친구의 말대로 이왕 TV를 살 거면 큰 거로 사라는 말을 듣고 큰 거로 샀다. 물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적당한 크기로 사고 싶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큰 거로 샀다. 얼마나 큰 거냐면 무려 75인치짜리로.


며칠 뒤 TV를 설치하러 온 기사가 우리가 기존에 썼던 오래된 TV(신혼 때 샀던 TV)를 보고는 요즘 이런 TV 보기 어려운데, 라는 말을 하면서 아주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TV를 잘 안 봐서... 하하하.”


조금은 민망했는지 아내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내의 말에 옆에 있던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은 사실이니깐.


기존에 썼던 오래된 TV가 치워지고 그 자리에 새로 설치될 대형 TV가 종이박스 안에서 나오는데 그만 내 입에서 “오오”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무지하게 커 보였다.

기존의 TV가 조막 만해 보일 정도로.

75인치 TV가 설치되고 나니 TV장식장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너무나 딱 맞아서 공간이 없어 보였다. 기존에는 넉넉하다 못해 양 옆이 남아 돌 정도였는데.


잠시 뒤에 설치기사가 리모컨 작동법을 잠시 설명해 주었다.


“고객님이 스마트 TV는 처음 써 보시는 거니깐...”라는 말과 함께 기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사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쏙쏙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내 공허한 눈빛을 보아서 그랬던 것일까?

마치 우리가 아니 내가 아날로그 세대처럼 보이나보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나의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명이 끝나고 나서 설치기사는 다른 고객을 방문하기 위해 빈 박스들을 치운 뒤에 청소기로 거실에 떨어진 먼지를 청소해 주고 가겠다는 했다.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본지라 당황한 우리는 괜찮다며 청소는 우리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에게 얘기했다. 요즘은 청소도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집을 방문한 기사가 유난히 친절한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기사가 떠난 후 우리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정면의 거대한 TV를 바라보았다. 화질이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사운드도 쾅쾅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이건 기사가 볼륨을 높여 놓았던 것으로 나중에 볼륨을 줄였다.)


아내와 내가 신기한 듯 새 리모컨으로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이내 화면을 껐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런 일로 내 심장이 세차게 뛰다니. 역시 갱년기인가 보다. 요즘 뭐만 있으면 다 갱년기 탓으로 미루는 터라.

꺼진 컴컴한 TV화면에 내 모습이 비치었다. 내 모습뿐만 아니라 앉아있는 아내의 모습까지 비치었다. 그전에는 감히 느껴보지 못한 스케일에 기분이 이상했다. 거실의 어디에 있든 내 모습이 꺼진 TV화면에 있었다. 역시 너무 큰걸 산 걸까?


TV를 사고 그날인가 그 다음날 밤에 처음 영화를 보았다. “오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분명 보는 맛이 있었다. 작은 화면으로 보다가 엄청나게 큰 화면에 거기다가 화질까지 엄청나게 좋은 화면으로 보니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갑자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TV 앞에 앉아 있다가 TV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지면 깔려서 다치겠는데...’

한동안 TV가 너무 커서 혹시 쓰러지거나 그러면 어쩌지? 하며 괜히 쓸데없는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가만히 세워 놓은 TV가 쓰러질 리가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크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조금 작은 것으로 샀어야 했나 봐, 라는 내 말이 며칠 동안 거실에서 들리고는 했다.


지금은 잘 적응해서 잘 보고 있다. 처음에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꼈던 크기가 지금은 크다고 느끼는 정도로 바뀌었다. 뭐든지 쓰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인지...


남들 다 보는 넷플릭스를 나도 이제는 본다. 참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 싶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지만.

진즉에 바꿀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꾼 것이 어디인가.


TV를 바꾸고 예전보다 TV시청 시간이 늘었다.

혹시라도 리모컨을 손에 꼭 쥐고 소파에 드러누워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따분하다는 듯 다리를 벅벅 긁는 내 모습을...

오, 네버 네버~~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내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긴...

오, 네버 네버~~



202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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