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을 알리는 비가 오는 날에

2019년 가을

by 자작가 JaJaKa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린다. 나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고자 열어 놓은 창문을 닫기 위해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비가 오는 창밖을 잠시 보다가 창문을 닫는데 갑자기 비 냄새가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비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벌름거렸지만 더 이상의 비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갑자기 내 코를 자극한 비 냄새가 나를 머나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데려간다. 비에 관한 기억 속으로...


비가 오면 동네에 있는 강아지들도 그러지 않은 데 뭐가 좋다고 비를 흠뻑 맞으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어른들은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염려를 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 나는 흠뻑 젖은 옷을 벗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비에 젖어 오돌오돌 떨면서도 마냥 신나 했던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도 있다. 어렸을 때는 빗방울이 똑똑똑 하고 커다란 대야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나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여름 더위를 식혀 줄 때면 한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비 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마와 팔에 닿는 시원한 바람의 감촉이 좋았고 때로는 비가 사선으로 내려 내 팔에 빗방울이 튕겨서 닿을지라도 나는 그것 또한 즐겼다. 음악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을지라도 나에게는 질리지 않는 소리로 기억이 된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고 난 뒤 뜻하지 않게 비가 내린 적도 있었다. 잠시 정류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금방 그칠 비가 아니라고 판단이 들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한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우산을 좀 가지고 와 달라고 할까. 그냥 비 오는 거리를 냅다 뛰어서 집으로 갈까.


집에 전화를 걸어 우산 좀 가지고 나와 달라고 하면 투덜거릴 게 뻔한 누나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나는 옷이 젖을지언정 뛰어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는 가방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나서 집이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빨리 뛰어서 갔다.


물웅덩이와 차량을 피하면서 사람들이 쓰고 가는 우산을 부러워하며 집을 향해 뛰어갔다. 집 현관에 도착해 보면 바지가 비에 젖어 기분 나쁘게 철퍼덕 거리며 살에 달라붙었고 가방은 젖어 물이 떨어졌다. 젖은 신발은 말리기 위해 베란다에 내놔야 했다.


그런 모습으로 집에 가면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를 듣지만 나는 안다.

전화를 하면 귀찮아하며 좋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비에 젖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씻어야 하는 등 불편한 부분이 있지만 그게 내게는 더 마음 편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20대에 비가 오는 날이면 감상에 젖는 날이 많았다. 이유 없이 기분이 처지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하고 내리는 비를 한참이나 바라보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에 담배를 피우면 그 연기가 낮게 깔려서 퍼진다. 담배를 피우며 퍼져나가는 그 담배연기를 바라보고는 했다. 왠지 비가 오는 날에 피우는 담배는 더 멋있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 있지 못하고 내리는 비속에서 마치 술 냄새가 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이 술을 마셔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 비 오는 거리를 보며 들이키던 술은 참 쓰디쓰다고 느끼면서도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거기에 잔잔한 팝송까지 더해지면 얼큰하게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로 흐르곤 했다.

비가 술이 되고 술이 눈물이 되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갈 때면 누군가가 내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올 것만 같고, 내가 우산 없이 걸어가면은 누군가가 내게 우산을 씌워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고는 했다. 마치 영화에서만 보던 그런 로맨스가 나에게도 일어날 것만 같은 상상.


지금의 나의 기억에 별로 떠오르는 일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은 역시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 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더러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싶다. 젊었을 때는 혹시 나에게도 그런 영화 같은 로맨스의 한 장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심술 맞은 사람은 그런 소리를 한다.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내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와서 같이 쓰고 가자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리따운 숙녀가 아니라 연세가 지긋한 아줌마나 아저씨면 어쩔 거냐고. 내가 우산 없이 걸어가는데 괜찮은 숙녀가 우산을 씌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몰라주고 씌워주지 않아도, 제발 안 그래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씌워주면 어쩔 거냐고.

그런 심술 맞은 사람의 말에 대답을 하고 싶지 않지만 뭘 어째, 같이 쓰고 가야지.

로맨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자유인만큼 잠시나마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하기가 꺼려진다. 옷이 비에 젖어서 달라붙는 느낌이 싫고 왠지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정하기 싫어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비가 오는 창밖을 보며 길이 막힐 것을 걱정하고 배달하는 사람들이 특히 힘들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다.

비를 보며 낭만을 생각하던 그 시절이 이제는 끝난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잠시 처량한 느낌도 든다.


비가 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이 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마 입맛은 변하지 않는 모양인가 싶다. 뜨끈한 국물을 훌훌 불어가며 떠먹으면 가슴 깊숙한 곳까지 그 따뜻함이 전달이 되어 뜨거운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낀다.


한 그릇 다 비울 때쯤이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어느새 몸은 따뜻한 온기에 기운이 나고 뒤이어 나른함이 밀려온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이 난다. 내 몸을 따뜻하게 해 줄 한 그릇의 국물이. 왜 비가 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이 날까.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다가 소파 옆에 놓인 책에 시선이 갔다. 엊그제부터 읽고 있는 책으로 프랑스 작가인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이다.

어느 날 문득 주인공 남자는 열개의 알약을 받게 되는데 그 알약은 주인공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그 시기로 데려가 준다. 주인공 남자가 너무나 보고 싶어 하던 사랑하는 여인을 다시 한번 보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3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 누구나가 다 꿈꾼다는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과거로의 시간여행.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많은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활용이 된다. 발명은 필요에 의해서 시작이 된다고 했던가.

과거를 돌이켜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과거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었다.

100층짜리 초고층빌딩을 상상이라도 했던가. 컴퓨터의 발명과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수만 킬로가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정보를 전달하고 받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달에 인류가 발을 내딛는 것을 상상이나 했던가.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어 그곳에서 전송된 사진을 본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던가.

과거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아니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지금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어쩌면, 정말 어쩌면 미래에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밖은 비가 내리고 있지만 나는 책의 후반부를 읽고 있다. 어떤 결말로 끝날 것인지.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60세의 나이가 되어 주인공 남녀가 해변에서 다시 마주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 뒤의 이야기는 나의 상상력이 채워야 할 부분으로 남았다. 부서지는 파도소리, 햇빛에 반짝이며 일렁이는 물결, 따뜻하게 내리쬐는 아침햇살,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해변에서 30년 만에 60세의 나이로 주인공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뭉클한 것이 올라온다.


책을 덮었는데 책의 여운이 나를 감쌌다. 잠시 동안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지금 이 순간의 떨림 속에서 있고 싶었다. 새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금 느낌 이대로 있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그런 절절함. 지금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과거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했을 것이다, 하며 상상을 하고는 한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다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다 했을 것이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 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무엇 때문에, 왜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 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과거를 비추어봤을 때 그 당시에는 소중함에 대해, 고마움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나간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봤을 때, 되돌아봤을 때 얼마나 내가 무지했는가를 깨닫고는 한다.

왜 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일까.


한번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과거를 돌아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뒤돌아보게 된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러지 말라고 의미 없는 짓이라고 하는 데도 말이다.


오늘을 최대한으로 충실히 살라고 하는 말에 동감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있다. 알면서도 선뜻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불평을 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는 말에 동감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평하고 짜증 나 있는 나 자신을 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 맘대로 잘 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일에, 사랑에 충실하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씀처럼 그런 삶을 하루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밖의 날씨는 점점 어둑어둑해져 가고 빗방울이 거세질 것 같은 분위기다. 내 손에는 아직 방금 읽고 난 책이 들려있다. 오후에는 새 책을 읽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조용히 책을 읽는 이런 시간을 가진다는 것을 소소한 행복으로 여겨야 할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할까. 뭔가 거창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고 삶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을 알리는 비가 오는 날에.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9년 가을에 쓴 글입니다.

2019년 가을비가 오는 날에 저는 위에 쓴 글과 같은 감성을 느꼈었나 봅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감성을 같이 느껴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지금의 제 감성과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시나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댓글과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