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44
지하철을 탔다.
오후 퇴근 시간이어서인지 차 안이 붐볐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방은 그날 준비물로 가득해서 무겁고, 이날 입은 치마는 길어서 활동성이 편해야 맞겠으나 치맛감이 얇아서 약간 시스루에다가 달려있는 속치마는 미니스커트 길이라서 운신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자칫 속치마가 들려올라가면 의도치 않은 곳이 시스루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움직일 때마다 치마를 신경 쓴 데다가, 거기에 날도 좀 더워서 기진맥진한 감이 있었다.
그런 터에 만 원 지하철을 타니 너무 피곤했다. 운 나쁘게 꽉꽉 들어찬 사람들 중에도 남자 무리 쪽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안기는 형국이 되지 않으려면 몸을 돌려야 했다. 백팩 때문에 힘겹게 돌아서니 이번에는 자칫 낯선 남자의 등 뒤에 붙어있는 모양새가 되려고 하니.. 진땀이 났다. 정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져니의 송골송골한 진땀은 다른 이들의 주르륵 흐르는 땀방울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 힘들었다.
만원 지하철이니 좌석에 앉을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있었던 곳은, 앉아있는 좌석 사람들 근처도 아니어서 누군가 일어난들 앉을 확률이 낮았다. 당연스레 일어나는 사람 앞에 있던 이가 착석할 것이 뻔하니까.
초점 잃은 눈으로 숨만 겨우 쉬고 있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이 손짓을 했다.
어떤 20대 남학생이었는데 나를 보고 "여기 앉으세요."라고 했다.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그 남학생은 일어서며 "이리 오세요"라고 꼭 집어서 나에게 말하고는 혹여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까 버티고 서서 내가 다가갈 때까지 기다려줬다. 져니, 의아함이 일었으나 일단 살고 싶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그 자리로 다가갔고 학생은 자리를 내어줬고 나는 앉았다. 털썩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다가 그 학생을 찾아봤다. 아직 다음 역이 안 왔으니 내리지 않았다. 나는 눈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남학생은 내 앞에 선 사람 뒤로 가버려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계속 의아함에 잠겼다.
그 남학생이 내리지를 않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내릴 때까지도 지하철 안에 남아있었다.
나는 그 학생이 자신이 내리는 김에 자리를 양보한 줄 알았다. 근데 안 내리고 있으니... 나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내가 힘들어 보였나?
핑크빛 치크를 좀 강하게 발랐는데 그것 때문인가?
얼굴이 벌게 보이면서 더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
내가 정말 죽을 상을 하고 있었나?
아님 날 할머니로 알고 경로 우대해 준 건가?
하지만 아직 할머니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나, 염색했는데.....'
왜 그렇게 후한 선심을 썼는지... 그 자신도 가방이 꽤 크던데.... 괜스레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내릴 때 그 학생과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착하게 생긴 얼굴에 살짝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마도 사심 없이 베푼 호의에 내가 지나치게 감사하는 눈빛을 보내서인 것도 같다.
어쨌거나 학생의 호의를 받은 게 너무 고마워서 신바람이 났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사람이 좀 쪼끔 하면 가끔 배려도 받는구나, 내가 연약해 보였나 봐, 푸하하핫!
이름 모를 학생의 착하고 총명한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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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해라, 당신이 만나는 사람 중 대다수는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중국 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