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58
1
예전에 지인이 그랬다.
"고추는 따고 따도 계속 나와. 따서 팔고 또 따서 팔고 그래"
농촌에서 사는 지인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2
우리 집 옥상에 텃밭이 있다. 어머니는 그곳에 오이도 심고 방울토마토도 심고 고추도 심어서 기르신다.
특히나 고추는 밭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심으셨는데, 과연 예전 지인의 말대로 따고 따도 또 열렸다.
그 고추로 된장 찍어 먹고, 찌개에 넣고, 라면 끓일 때도 넣는 등, 계속 열리니까 원 없이 따 먹었다.
3
어머니가 고추 꼭지를 따야 한다고 하셨다.
텃밭 고추가 어찌나 실하게 많이 열리는지 빨간 고추만 한 포대였다. 어머니는 올여름 옥상에 고추를 널어 말리셨고, 폭염은 빨간 고추를 바스락 부서질 정도로 바짝 마르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태양초'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 태양초를 방앗간에 빻아오기 위해 우선 고추 꼭지를 제거해야 한다시며 나와 아버지를 호출하셨다.
4
우리 세 사람은 거실에 둘러앉아 고추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쌀 포대보다 더 길고 큰 포대에 고추가 한가득이었다. 그걸 다 따려니 한숨부터 나왔지만, 뭐 난도가 높은 작업도 아니고 셋이 하면 금방 끝나리라 기대했다.
나는 고추 꼭지를 정말 열심히 땄다. 뭘 하던 중에 불려 나온 것이라서 얼른 하고 다시 하던 걸 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다.
5
때는 아시안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였고, 아버지는 한국 여자 배구전이 나오는 tv를 보시며 꼭지를 슬렁슬렁 천천히 따고 계셨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빨리 내방으로 돌아가려면 아버지를 분발시켜드려야 하겠구나.
6
"이거 끝나고 고추 꼭지 제일 적게 나오는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는 내기해요."
어머니는 워낙 손이 빠르셔서 이미 고추 꼭지가 한가득, 승세를 진작에 잡으셨고 나와 아버지의 꼭지 무더기는 크기가 엇비슷해서 박빙이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내가 조금 더 많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분발하시기 시작했다. 보던 방송을 외면하시더니 한 번에 수어 개의 고추를 집어 들고 따시는 데 "파파박' 하는 환청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마치 손에 모터를 다신 듯 신속하고 정확하게 꼭지를 따기 시작하셨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분발했다. 내 손에서도 아버지 못지않게 "다다닥"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갑자기 말없이 꼭지 따기에 집중하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실 뿐이었다.
7
마침내 고추 꼭지를 다 땄다.
어머니는 말했듯 압도적 1위였고 아버지와 내 꼭지 더미 크기가 문제였다.
엇비슷해 보였으나, 사실 내 것이 좀 적었다.
아버지는 "내가 더 많아! 아이스크림 사 와!"라고 하셨고 나는 "내 꺼가 더 많은데요? 꼭지 세어봐요"라고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 꼭지 개수를 헤아릴 것 같은 기색을 보이셨고 나는 그 순간 행동을 개시했다.
8
아버지의 고추 꼭지 더미와 내 더미를 화투판 쓸어 뒤엎듯이 휘저어 섞어버렸다.
그런 후 "내기는 없었던 일로 하죠."하고는 일어섰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웃으셨다.
9
안다, 내가 유치했다는걸.
하지만 내기 덕에 25분 만에 작업을 끝냈다.
10
깨달았다, 목표가 있으면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승부욕이 큰 동력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나라는 사람은, 지면 유치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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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죽던 살던 결국 다른 점은 눈꺼풀의 위치일 뿐이다"
(In war, you win or lose, live or die - and the difference is just an eyelash)
-맥아더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