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79
1
강좌를 같이 듣는 쌤이 미술 강좌를 소개해주셨다.
사군자 강좌인데 수강료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대나무 잎사귀 하나를 그어 그리는 것에도 방향과 힘 조절과 모양을 자세히 가르쳐 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 강좌를 수강하는 쌤의 매화와 대나무 그림이 잘 가르친다는 증거였다. 섬세하고 유려한 게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본 건 본 작업물이 아닌 습작물이었는데도 그러했다.
이러하니, 유혹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정보를 들은 게 작년이었다. 쌤은 얼른 들으라고 재촉하셨지만, 난 올 3월이 지나면 생각해봐야겠다고, 그리 말해놓고 유혹을 뿌리쳤다.
2
아버지는 매일 산을 타신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대체 등산의 매력이 뭐길래 저리 산을 타시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부지, 나도 갔다 올 수 있는 쉬운 등산길은 없어요? 내려다볼 수 있는 정상을 오르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가파르지 않고 둘레길처럼 완만한 길로 정상까지 갈 수도 있어요? 나도 델꾸 가요, 네?"
나는 그냥 단발성으로 한번 가려고 했던 건데 아버지는 내가 등산을 운동으로 삼아 매일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오르려면 등산화가 있어야 하는데, 네 엄마 등산화를 빌려봐라. 언제부터 갈래?"
'언제부터'라니?
'~부터'는 '~까지'를 불러내오는 건데... '죽을 때까지'라는 답을 원하시는 건가?
아버지는 의도하시지 않았겠지만 뭔가 나는 유인성 질문에 휘말리고 걸려든 것 같았다.
나는 떠밀리듯 대답했다.
"3월 부터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자꾸 일을 벌이고 있고, 그 일들의 시작을 모두 3월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3
큰일이다.
등산 하나만 해도 기진맥진할 텐데 사군자 강좌에 다른 여러 가지 일들까지 해나가려면....?
4
침착하자. 아직 그림 강좌 수강은 선택을 안 했고, 아버지께 나는 당신처럼 매일 등산은 못한다고 해야겠다.
아아. 어찌 되었던 등산은 '빼박캔트', 몇 차례 해야 할 것 같다.
5
이렇게 된 이상, 그저 좀 기대를 한다면, 등산으로 체력이 향상되면서 동시에 작업 수행할 체력도 강화되었으면 한다.
6
아버지께서 의도하고 유인술을 쓰신 건 분명히 아니다.
상황을 복기해보니 내가 말을 애매하게 했다.
의도치 않게 등산을 하게 되었으니, 한숨이 크게 나온다.
왜 말을 애매하게 해가지고...흑
그래도 다행인 건, 좋은 방향으로 귀결되었다는 점 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수도 있고,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고 오랜 연을 끊을 수도 있다.
여기서의 말이란 선의와 함께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7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의도의 표현이 뚜렷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정확한 사람'과는 거리가 좀 있다.
엄청스레, 끝장나게 더 많이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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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충실한 사람을 만들고
대화는 재치 있는 사람을 만들고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프랜시스 베이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