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프린트기

시즌5-086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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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린트할 일이 있어서 출력소를 찾았다.

그간 도서관에서 한두 장의 문서를 출력할 뿐이었는데 갑작스레 135장의 문서를 프린트하려니 도서관에서는 무리이다 싶었다.

그래서 찾게 된 출력소는 버스로 4정거장을 가야 만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가는 곳이었다.

가기 전에는 usb를 건네주면 알아서 출력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가니까 남자 직원이 컴퓨터 한자리를 가리키며


"저기서 출력하세요."


라고 간단하고 성의 없이 말하고는 다른 곳으로 휭 가버렸다.

보니까 네다섯 자리의 컴퓨터 자리가 중앙에 있었고 벽을 따라 출력기가 놓여있었다. 일종의 출력을 위한 pc방 같았다.

어쩌겠는가, 자리에 앉아서 usb를 포트에 꽂았다. 문서를 열고 프린트 창을 열어 인쇄 범위를 문서 전체로 선택하고 여러 대의 프린터기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인쇄 버튼을 눌렀다.

등 뒤 쪽의 어느 프린터에서 덜커덕 소리가 나며 A4지가 출력되고 있었다. 근데 그 출력기에서 나오는 게 내 것인지 아닌지 헛갈렸다. 그러나 타이밍이나 거리상으로 내 것 같았는데, 큰일은 여기부터다. 종이가 너무 빳빳하고 두꺼웠다.

사태의 이상함을 느끼고 직원을 불렀다.


"저기, 이게 제 것이 나오는 건가요?"


직원은 오더니


"컬러 프린트 선택하셨어요?"


라고 한다. 나는 당연히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이 출력소의 장비가 대단히 성능이 좋더라. 직원이 다다라서 멈추기 직전까지 무려 69장, 절반이 출력되어 나왔다. 이럴때 고장도 안난다.

직원은 컴퓨터로 다가와 다시 흑백 프린트기를 선택해주고는


"손님이 선택하신 게 컬러였어요. 이제 다시 프린트 하세요."


라고 했다.

기분이 찜찜했지만 출력했다.

잠시 후 출력이 다 된 프린트물을 가져와서 직원이 말한다.


"만 오천 원입니다. 컬러 프린터 한 거는 반값으로 쳐드렸어요."


그냥 A4지 흑백 프린트는 100장이 넘어가면 40원으로 쳐준다. 6천 원이면 떡을 치고도 남을 가격인데 만 오천 원이라니.

씁쓸했지만 어쩌겠는가. 한 장 300원짜리 컬러프린터를 사용한 내 실수이니까 군말 없이 값을 치렀다.

출력소를 나와서 속이 상해서 지인에게 전화를 걸고 한바탕 하소연을 한 뒤 집을 향해 걸었다. 한 2정거장을 걷고 나니 마음이 정리되고 다리가 힘들었다. 때마침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마을버스 정류장도 나타났다. 그래서 마을버스를 탔다.

출력소 프린트기가 정말 성능이 좋았다.

마을버스를 타고 버스카드를 단말기에 대니


"환승입니다."


라는 말이 나왔다.

200장을 출력하고 두 정거장을 걸어왔는데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웃겼다.

어쨌든 다음에도 그 출력소를 이용할 것 같다.

프린트기 성능이 장난 아니게 빠르고 좋았으니까 말이다.







2


프린트 사건 이후에는 봉사활동을 갔는데 봉사 끝나고 돌아갈 때 어르신 한 분이 가만히 따라나오셔서 사탕 한 움큼을 몰래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감사하긴 한데 왜 자꾸 나한테만 주시나?

나 비밀 싫어하는데...

경로당을 벗어나서 봉사자 샘들에게 나눠드렸다.

근데 몰래 건네주셔서 샘들에겐 어르신이 주신 거라고 말을 못했다.

사실 말해도 상관없는 것 같지만, 일단 말할 틈이 없기도 했고, 또 할머니가 몰래 주신 데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경로당에 계신 어르신들까지 챙겨줄 수 없어서 몰래 따라나오신 것 같고, 또 봉사자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수가 없어서 나보고 '알아서 분배해서 먹어라'라고 하신 것도 같고, '내가 생색내는 걸 싫어해.'라는 의미인 것도 같고...


아 정말, '사탕은 대놓고 줘야 하며, 한 사람당 한 개씩, 인원 수대로만 건네줄 수 있다.'라는 엄격한 법이 생겼으면 좋겠다.

게다가, 인원이 짝수인데 홀수로 주시면 정말 곤란하다.

나누기가 애매하잖아~

어르신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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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배울 수 있는 실수들은

가능하면 일찍 저질러 보는 것이 이득이다.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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