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88
1
드립 커피용 종이 필터 1봉지를, 한 봉지에 들어있는 100매를 다 사용했다.
거의 매일 한 장씩 꺼내어 사용했으니 그동안 3달은 지났다는 뜻이다.
하루에 한 번씩 종이 필터를 봉지에서 빼내었고 이틀 사흘 시일이 지나면서 봉지는 점점 홀쭉해졌다.
그리고 급기야 이제 텅 비어서 납작하게 되었다.
2
보통 뭔가를 쌓으면서 성취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서, 머릿속에 지식이 쌓이면서, 직급이 올라가면서, 그러한 것들이 느껴지게 만든다, 성취감이라는 것을.
3
근데 나는 소비하면서 성취감을 느낀다.
내역이 채워지면서 줄어드는 통장 지면을 보면서, 쌓아둔 책들이 줄어들면, 노트 종이를 다 채워서 페이지가 없어지면, 그리고 종이 필터가 줄어들어 없어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것이다, 성취감이라는 것을.
4
좀 이상스럽긴 해도, 어쩐지 나에게 성취감이라는 것은 정말 무엇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사용해버리는 데에 오래 걸리는 것을 차근히 써버리면서 느끼는 일종의 만족감 같은 것이다.
5
그런 이상스러운 성취감을 만족시키려고 나는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고 있다.
얼마 전 '2019 다이어리'가 두 권 더 생겼다.
해당 연도의 다이어리는 꼭 그해에 써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다음 해에는 날짜와 요일이 맞지 않게 되어서 '나쁜' 다이어리가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그 해 다이어리는 그해에 쓴다'라는 일종의 '주의'와 노트를 기왕이면 끝까지 다 사용해서 성취감을 느끼려는 열망이 생겨난 것이다.
6
이미 다이어리를 5권 사용하고 있다. 이걸 상반기에 다 사용해도 하반기에 사용할 다이어리가 4권 정도 더 있다.
아아.. 소비하며 느끼는 변형된 성취감.
그걸 느끼자니 지금부터 하반기까지 꼼짝없이 다이어리만 적어야 할 것 같다.
7
-져니 님, 2019년 한 해는 져니 님에게 어떤 해였나요?
-예, 죽자 살자 다이어리만 적다가 끝난 해였지요. 다이어리를 손으로 끝장나게 노상 적다 보니 학생적에나 있었던 중지의 굳은살이 부활했지 뭡니까, 호호. 정말 열심히 살았지요.
-그런 거 말고 업무적으로 변화는 없었나요?
-호홋, 왜 없었겠어요. 다이어리를 하도 적느라 볼펜 똥이 여기저기에 묻었고 손에 묻었던 것이 얼굴을 비비다가 코 옆에 옮겨 묻었어요. 호홋. 그 상태를 모르고 미팅을 나갔는데.. 저를 보고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어요. 사람들은 기분 전환이 돼서 업무 성과가 올라갔대요. 저는.. 모르겠어요.. 좀 우울하더라고요. 마음에 두고 있던 팀장님이 저를 보고 폭소를 터뜨렸었는데.... 화장실 가서 거울을 보니.. 오서방을 아세요? 코 옆에 점 있는 오서방 같지 뭐예요. 저는 그날은 다이어리를 안 적었어요. 왠지 모르지만 기운이 없었거든요. 아.. 근데 저 왜 이렇게 우울하죠?
-저런.. 앞으로는 똥 나오는 볼펜 말고 닙펜 같은 거 쓰세요.
8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다이어리는 다 써야 하고, 성취감도 맛보고 싶고...
좀 힘들긴 하지만 다이어리 적는 건 아직까지는 재미있다.
아.. 정말 하반기까지 다이어리 적는 거에 몰두하느라 작업을 못하는 게 아닐까 슬쩍 걱정된다.
9
오늘 봉지 안의 종이 필터를 다 사용해버렸지만 필터를 이미 대량 구입해놔서 걱정 없다..
다이어리 적는 걱정은 좀 내려놓고, 다시 100일 후의 성취감을 위해 필터 한 장 사용해서 커피 내리러 간다.
10
그리고...
봄날, 날씨도 좋고... 아아... 봄날이다.
빛도 좋고 공기도 좋고, 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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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성취는 언제나 특별하지 않은 준비 뒤에 온다.
-로버트 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