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자

시즌5-097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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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리강좌를 신청했다.

단 이틀간 열리는 무료 요리강좌인데 아마 매해 구청에서 해왔던 프로그램인듯했다.

웹으로 신청을 받고 선착순으로 18명을 뽑는다고 해서 얼른 신청했고 '왜 연락이 안 오는 거야?'하는 생각도 잊힐 때쯤 문자가 왔다. 선정되었다는 문자였다.

이게 웬일, 즐거워라~~

감바스, 라따뚜이 등등 그런 거 갈켜준댔는데 잘 배워서 나중에 아부지, 어무니랑 맛나게 해 먹어야지.

랄라~~~


그런데 어제 전화가 왔다. 요리강좌 운영진인데 수업일에 지역 방송국에서 요리 과정을 찍으러 나오게 되는데 촬영을 해도 괜찮은지를 물어온 것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럼 방송에 얼굴이 나오나요?"

"아뇨. 수업 장면을 찍으면서 수강생들이 촬영될 수 있지만 아마 작게 나올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배우고 싶었고 요리를 맛보고 싶었다. 내가 촬영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러시다면 안타깝지만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없으실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나를 빼버리고 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공짜로 가르쳐준다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라고 생각하며 괜찮다고 했다.

저쪽에서는


"알겠습니다. 따로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나는 물을까 말까 하던 질문을 던졌다.


"앞치마를 꼭 가져가야 하나요? 집에 있는 앞치마가 너무 안 예뻐서 가져가기 싫은데요."


저쪽에서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이쪽에 준비된 앞치마가 있으니까 그냥 오셔도 돼요."


왜 침묵했을까? 웃었나? 내가 괜히 쓸데없는 걸 물었나?

하지만 집에 있는 앞치마는 정말 멋대가리 없이 주황빛이 형형해서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준비물로 앞치마를 챙겨오라는 문자에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제는 오로지, 요리 배우는 날 카메라에 잘 안 찍힐만한 자리에 착석하는 것만이 신경 쓸 일이다.


기이다아려어라아! 라아따아뚜이이~ 가암바아스으~






2


영어 강좌에 수강생으로 선정되었다.

그 학원은 늘 신청자가 많아서 추첨으로 수강생을 뽑는 곳이었다.

재작년부터 신청해봤는데 번번이 탈락하다가 올해 운좋게 선발되었다.

재빨리 수강료를 입금하고 내친김에 얼른 인터넷 서점에서 교재도 주문했다.

책이 도착해서 급히 열어봤다. 음....?


영어강좌는 레벨 B, 레벨 1, 2, 3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레벨 1을 선택했다.

사실 심정상으로는 제일 쉬운 레벨 B를 선택해야 맞겠으나


'그래도 그간 틈틈이 공부도 좀 했고 하니 레벨 1 정도가 적당하겠지.'


라고 생각, 당당하게 신청했는데 도착한 레벨 1 수업의 교재를 슬쩍 훑어보니...


'음.. 어렵네? 당황하지 말고 좀 더 살펴볼까? ...좀 더 살펴보니... 정말 어렵네?'


마음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6개월짜리 강좌인데 과연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있다가만 오는 거 아냐?'


젠장, 나는 모르겠다. 그냥 돈은 냈고 하니 참가하여 착석은 하겠지만 구석자리에 앉아야겠다.





3


이래저래 숨어있기 좋은 자리를 찾아야 하겠다.


져니는 옛 시절의 '은자'도 아니고 그냥, 저스트, 숨은자.

아우... 폼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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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은자(隱者)와 같고,

술은 기사(騎士)와 같다.

술은 친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고

차는 조용한 유덕자(有德者)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임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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