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6-002
1
추석이다.
왠지 밤이 되어야 제대로 추석이 된 것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추석의 한낮.
너무나 찬란한 햇살과 활동하기 딱 좋은 적정온도로 화려한 한낮을 선보이고 있다.
추석 한낮이 이렇게 사치스러워도 되나?
너무 아름답잖아.
2
이 아름다운 날에 배가 고팠으면 저런 찬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추석날의 식탁 다리는 고생이 많다.
고기, 해산물, 채소가 듬뿍한 반찬들, 그 반찬에다 밥을 먹고 나면 후식으로 과일을 깎아 먹었고 그 후식이 끝나면 이제 진짜 입가심이라며 식혜를 마셨다.
배가 두둑하게 부르고 오랜만에 오빠 내외를 만나니 반갑고.
그런 기분에 눈부신 낮을 맞이하니 식탁 다리에게 미안했던 마음은 잊히고 한없이 풍요로운 느낌에 젖어들고 만다.
3
그렇다 해도 걱정이 없을 수 없다.
동실동실하게 살쪄가는 내 배가 문제거리이고, 잘 풀리지 않는 작업 일정이 걱정이다.
새 작업의 시작과 내년 마감까지의 일정 조율이 신경 쓰이고, 올해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는데 어느새 내년 계획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데에 생각이 다다르자 '세월이 쏜살같다더니...'하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4
거둬들인 결실로 한 해의 성과를 축하하고 누리는 날이다.
결실의 날....이라.... 내게... 결실이, 성과가 있었나?
물론이다. 있었다고 단언한다.
내 나름, 작업에 몰두해서 얻어낸 결과물이 있다.
가시적인 성과는 분명히 있었지만 좀 더 명확하게 성과라고 지칭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가시적 성과와 좀 더 명확한 가시적 성과.
물질계에서는 명확히 보이는 성과가 아니면 으쓱하기가 힘들다.
나 자신에게 <명확한> 그런 성과가 없었잖냐고 짚어 물으면 스스로조차 움찔 움츠러든다.
아무래도 내가 물질계에서 "으쓱"할 수 있는 명확한 성과를 원하는 것 같다.
5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서 인정욕구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이렇게도 강렬한 이 욕구는 맨 마지막 자아실현의 욕구 단계에 해당해야 옳을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3단계의 사회적 욕구 단계쯤인 것 같다.
자아실현하고 혼자서 으쓱하는 것이 멋지고 폼날 것 같다.
나는 아직 자아실현의 욕구도 사회적 욕구도, 그 어느 것도 채우지 못했는데 혼자 으쓱했었다.
분명히 작업하는 도중과 완성한 당일에는 으쓱으쓱했다.
근데 작업물 검수를 보내놓고 나니 말린 대추처럼 엄청 쭈그러들었다.
자긍심, 자신감, 자존감, 자랑... '자' 자로 시작하는 건 다 쭈그러든 것 같다.(... 자두.. 자전거..는 아니구나.)
6
예전에 어느 싱어송라이터가 말했다. (기억이 맞는다면 박진영 씨로 기억한다.)
"제가 만든 곡이 스스로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안 좋아하면 별로일 것 같아요. 저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곡이 좋더라고요."
7
자기만족적인 예술성 있는 곡과 대중들이 좋아하는 상업적인 곡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흔쾌히 상업적인 곡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그의 흔쾌한 태도에는 그저 잘 팔리는 곡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과 교감, 소통하는 곡이 좋다는 뜻이었다.
8
져니는 신나게 작업을 했고 작업물을 만들어냈다. 그것만으로도 져니는 감정의 순화와 기쁨을 맛봤으니 '창작'이라는 행위의 효용은 맛볼 대로 맛봤다고 하겠다.
근데.... 져니도 자신의 작업물을 사람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면, 져니의 작업물이 소통 가능한 생기 있는 작품임을 증명해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10
져니님은 355개의 작품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애착 가시나요?
다 제 자식 같은 작품들이라 애착이 가지만 21번째 작품과 23, 43, 66,111, 157번째 작품이 제일 친근하답니다.
아. 그 작품들은 사랑을 '폭발적으로 엄청나게 끝내주게 기깔나게 많이' 받은 작품들이지요?
네. 그 녀석들 덕택에 대중들과 많이 만나 뵐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저도 녀석들을 다시 보곤 한답니다. 정말 폭발적으로 엄청나게 끝내주게 기깔나게 많이 사랑을 받았거든요.
57, 76,123번째 작품들도 사랑을 많이 받지 않았었나요?
그 작품들은 센세이션 하다고 평을 받았지요. 너무 극찬을 받아서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 어렵네요. 격한 파문의 감정이 인다,라는 평을 받았다는 것쯤을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초기 22번, 38번 작품도 뒤지지 않는 탁월함이 있던데요?
탁월함뿐이겠습니까, 유려함과 수려함과 다채로움이 있다는 평도 받았었지요. 또한 ....
11
아. 내 입으로 내 작품을 자랑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일단 작품 검수가 끝난 후, 다시 저 백일몽을 꿈꿔볼 생각이다.
12
한가위의 낮은 환하고 화려하고 풍요로웠고, 져니의 백일몽도 화려하고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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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정이 바로 보상이다.
-스티브 잡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