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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Oct 19. 2019

화이트보드의 장점

시즌6-007




1


600*400 사이즈의 화이트보드가 생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전부터 집에 있던 것인데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서 방치된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그걸 좀 활용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 보드를 무릎 위에 놓아두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목표도 적어보고 상념도 적어보고 일정과 계획도 적어봤다.

한정된 넓이 때문에 적다가 공간이 없어지면 지우개로 싹싹 지워야 했다.

지우는 묘미 때문에 져니는 그만 화이트보드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2


'백지 공포'라는 것이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이나 글을 끄적이려고 할때 종이를 망치거나 허접한 작품을 그려낼까 봐 두려운 나머지 주저하게 되는 감정을 말한다.


꽤 오래전에 져니는 두꺼운 마커나 펜으로 못쓰는 종이, 전단지나 신문지 위에 그림을 끄적였다. 어차피 재활용으로 버리게 될 종이니까 굳이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게 되었고 그 덕에 그림에 대한 백지 공포는 어느 정도 벗어나 스스럼없이 그림을 끄적일 수 있게 되었다.


다이어리를 여러 개 사용하는 져니는 일정과 메모 등을 기록할 종이가 모자라지 않는다. 외려 남아돈달까.

하지만 깔끔하고 보기 좋게, 의미 충만한 메모를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글에 대한 백지 공포에 걸려들고 말았다. 


화이트보드는 백지처럼 하얀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지 공포를 유발하지 않는다. 그 옛날 끄적여 사용한 신문지를 버려버릴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이것도 지우면 흔적이 남지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참 좋다.

만약 써놓은 메모가 좀 마음에 든다 싶으면 폰으로 촬영해서 간직할 수도 있다. 백지 공포가 발생하지도 않고 기록의 취사를 선택할 수 있으니 꽤 괜찮은 물건이지 싶다.





3


요즘 이 화이트보드를 이용해 신나게 놀고 있다.

어차피 지워버릴 글이기 때문에 별의별 문장을 다 적어본다.

심지어 일기에도 적지 않는 내밀한 생각을 적어보기도 했다.

화이트보드의 장점은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수도 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할 수 있어서 종이 절약에 기여하면서도 백지 공포를 완화시키며 더불어 솔직하게 내면의 생각을 표현해볼수 있다. 

바로바로 지우기만 하면 비밀 유지도 탁월하고 말이다.




4


화이트보드에 이것저것을 끄적이다가 보드에 붙어있는 받침대가 거추장스러워 아버지께 가져가 도움을 요청했다. 펜 받침대를 분리시켜달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만지시다가 어렵지 않게 빼내어 주셨다. 너무 쉽게 빼내어주시니 나는 머쓱해졌는데, 그때 본 아버지의 얼굴에 뭔가 '이 녀석 대견하네.'하는 표정이 어려있으셨다.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봤는데 모르겠더라. 

방으로 돌아와 끄적이던 것을 마저 완성하려고 보드판을 봤더니, 


"2020년 OOO과 OOO 완성하기, 2021년은 OOO...."


보드판 가득, 포부 큰 장기 계획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냥 허풍떨듯이 내 심중의 욕심을 다 적어놨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보시고 기특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정말 이 녀석이 해내려나?'하는 관심과 기대가 아버지 얼굴에 가득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보실 줄 알았으면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체력관리, 영양섭취를 중요시할 것, 

우선 당장 치킨 섭취 요망.'


..이라고 써놓을 걸 그랬다. 그럼 치킨 사주셨을지도 모르는뎅. 






5


화이트보드의 장점은 종이 절약, 백지 공포 완화, 속마음 토로하기 좋음, 바로바로 지우면 비밀 유지의 장점이 있으며, 가끔 대견한 자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

물론 마지막 장점은 '되게 좋은' 목표를 적어서 부모님이 잘 보실 수 있는 곳에 놔둬야 한다는 게 핵심 팁.




6


이상 화이트보드의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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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이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기록하려는 욕망이다.



- A. 로우얼(현대 미국의 시의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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