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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Oct 26. 2019

자잘한 이야기 04

시즌6-008






1


드립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원두 20그램을 갈아야 한다. 그 20그램을 핸드밀로 다 갈려면 손잡이를 잡고 약 130번을 돌려야 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3분쯤 되는 시간인데 나는 그 시간을 견뎌내기 힘들어한다. 

처음에 핸드밀을 돌릴 때는 '이거 운치 있네, 캬하!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커피를 갈면서 향도 맡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라고 중얼거렸었지만 불과 1년 사이에 그런 기분은 싹 사라지고 '전동 밀을 하나 구입할까?' 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르고 있다. 

하지만 멀쩡한 핸드밀을 방치하면서 물건을 늘이는 게 마땅치 않아서 그냥 사용하고 있다.

핸드밀로 원두를 갈고 포트로 물을 떨구어 드립 하기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다. 따지고 보면 긴 시간도 아니다. 

전동밀을 산다 하더라도 결국 시간은 2분 정도 단축될 뿐이다.

부모님은 "너는 운동을 안 하니 그거(핸드밀)라도 돌리면 팔운동이 되니까 그냥 그걸로 해."라고 하신다.

그 말씀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물건 늘이는 게 싫어서 그렇다.





2


지인과는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 않지만 대화를 제법 많이 나눠봤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무슨 책을 많이 읽느냐고 내게 묻기에 예전에는 자기 계발서를, 요즘엔 고전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답했다.

지인은 자기 계발서를.... 뭐랄까... 하면 된다고 무조건 부추기는, 가벼운 류의 읽을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걸 알아서 나도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 얻은 것도 많아서 일부러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자기 계발서의 대다수는 '하면 된다.'를 표방하고 있으나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생각이라는 파장의 에너지를 공명시키는 것.'과 같은 내용으로 진화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글쎄, 내가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해서 그녀의 인식을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스트레스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미묘한 감정이 오고 간 지인과의 대화를  완벽하게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새삼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어야 했나를 이제서야 떠올려보게 된다.


그저, 자기 계발서의 시작은 성공담의 나열이지만, 진화하여 뉴에이지의 성향이 담기면서 스스로를 바라보기, 마음의 욕망을 인식하고 상태를 바라보기, 생각 조절하기 등, 정신적인 관리를 하게끔 사색과 명상의 길로 인도한다는걸, 지인에게 알려주지 못해서 아쉽다.





3


좀더 강력하게 좋은 책도 있다고 말을 하지 못한 건,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의 사고체계에 관여하는 것도 즐기지 않아서이다.

게다가 지인은 책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다른 이에게 책을 권유하지도 권유받지도 않는다고 하니, 아마 내가 책을 추천해도 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한, 아직 낯가리는 사이, 지인과 나는 나란히 걸으면서 자기 계발서에 대한 서로의 관념도 평행으로 두었다.





4


이 새벽. 핸드밀도 한 번 쳐다보고, 지인을 한 번 떠올려보고, 내일 일정도 생각해보면서 기지개를 켰다.

3일 1책의 계획은 무너진지 오래지만, 계속 추진 중이다. 책을 읽어야겠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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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의 포로일 뿐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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