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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Nov 09. 2019

실패에 대한 대화

시즌6-010



1


요 며칠 전 나는 실패를 겪었다.

실패를 겪는 마당에 즐거울 수는 없었기에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울하지도 않았다.


좌절감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라고 하기엔 그날 밥도 맛있고 식욕도 왕성했다. 

좌절의 괴로움으로 움직이는 것마저도 힘들었다....라고 뻥을 칠 수도 없게끔 석류즙을 찾아먹고 커피도 갈아서 드립 해 마시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무기력함으로 비롯된 불면의 밤이 괴로웠다....라고 엄살도 좀 부려보고 싶었는데 그날 밤, 수면 가스 마신 양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어디에서도 실패의 괴로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내 능력이 부족한가 보다.'라는 생각은 했다.





2


경쟁 사회에서 능력의 유무는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다.

며칠 전의 실패는 지극히 치열한 경쟁전에서 실패한 것이었고 그래서 스스로의 능력 유무를 한 번쯤 자문해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밥그릇을 싹싹 다 비우고 여유로이 커피, 석류즙 마시고, 잘 때 되니까 득달같이 잠도 잘 자는 나를 인식하며 '이앤 대체 뭐지?'라고 스스로를 3인칭으로 놓고 생각하게 되더라.





3


결국 실패는 경험과 실력의 부족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인식하는 건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칭찬도 서너 번 받았었기에 나름 괜찮은 솜씨인가 보다,라고 약간의 자신감도 가졌었다.

이제 와 보니, 다 부질없는 자신감이었다. 새로운 분야였고 첫걸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말했듯 실패는 유쾌할 수 없었지만 나는 자꾸 놀라게 된다.





4


실패했으니 식음을 전폐하며 앓아누워야 하지 않았을까?

최소한, 창에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우울해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위로의 말을 구걸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멀쩡했다. 

먹을 거 다 먹고, 잘 거 다 자면서, 볕 잘 들어오는 방에서 오락방송을 보며 희희낙락하다가, 책도 읽고, 먹을 거 더 없나 냉장고를 열어보고.....

하여튼 너무 말짱했다. 너무나 말짱해서 나는 놀랐다.




5


내가 원한 내 모습은, 다소 폐인처럼 좌절감에 휩싸여 며칠 앓다가, 심기일전 의욕을 불사르며 일어나 폭풍처럼 작업에 몰두,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왠지 그런 모습이 극적이고 더 드라마틱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온화하고 심지어 행복했다.

3인칭으로 두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앤 대체 뭐지?'





6


야, 정신 차려, 너 떨어졌어.


알아. 다시 또 만들면 돼.


너, 그거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줄 알잖아? 그런데도 그렇게 태평하냐?


어차피 있는 건 체력이랑 시간 밖에 없어. 괜찮아.


너 실력 구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또 떨어질 걸?


괜찮아. 떨어지면 개인 소장용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돼. 그리고 어차피 나중엔 다 소개될 거야.


어차피 소개된다고?


응. 내가 잘 되면 나중에는 초기 작품까지 주목받게 될 테니까. 어쩔래? 사인받아 갈래?


됐어! 지 주제에 무슨.


나중에 인터뷰할 때 네 이름 실명으로 말해도 돼? 역사에 남기고 싶은데.


내 이름? 왜 말하려고?


나처럼 위대한 인물도 너같이 허접한 놈한테 무시당한 오욕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해주려고. 그래야 후배들이 용기를 얻지.


.... . 허접한? 내가 훌륭한 인물이 되면 안 말할 거겠네?


아니지. 너처럼 별 볼 일 없는 놈이 역사에 허접한 놈으로 이름 남는 게 싫어서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서 겨우 사람 구실하면서 살았다고 남겠지.


내가 더 위대한 인물이 되면 안 쓸 거야?


아니지. 그래봤자, 너는 나보다 허접할 테니까... 왜? 실명 말하지 마?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해지면 말 안 할 거야?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더 말해야지.


왜? 위대한 인물이랑 친구였다고 하게?


아니지, 그 위대한 인물이 예술에는 까막눈이어서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알려줘야지.


....실명... 말 안 하면 안 돼?






7


낙관주의 나와 비관주의 나의 대화였다.





8



'이앤 뭐지?'라고 생각한 건 비관주의 나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낙관주의 나'가 이겼었나 보다.

맘 편하게 먹고 자고 한 걸 보면.





9


어쨌거나 나는 실패를 겪었고 나름 좀 심란했다.

하지만 여전히 평화롭고 잘 먹고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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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실수가 어리석은 것이라 말해선 안된다.

We must not say every mistake is a foolish one.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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