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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Dec 21. 2019

뻘쭘하다

시즌6-016






1


같이 수업받는 지인이 영어 수업받는 데에 이런저런 정보를 줬다. 

그러더니 이번엔 영어강좌 수강기간 내내 수강신청 인원을 체크해서 알려주더라. 

하루하루 빠지지 않고 알려주길래 그 성실성과 배려심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이름을 붙여줬다.


"000 통신이 있어서 편하네요."

이름이 중요하다. '000 통신'이라고 이름 붙여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이었는지 모르지만 지인은 정말 정보통신사처럼 이런저런 정보를 내게 알려주었다.

수강생 선정 결과 공고가 나왔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지인이었다. 공고를 찾아보고 선정되었음을 알고 기뻐할 때쯤 그제서야 학원 측에서 알림 문자가 왔다. 업체의 공고보다 빠른 정보, 정말 정보통신 답지 않은가?

게다가 지인은 몇 분 내로 다음 학기 교재가 무엇인지 알려주더니 그다음엔 교재의 관련 자료를 어디서 다운로드할 수 있는지 링크까지 알려주었다.

이쯤 되면 이런 서비스를 무료로 주는 지인이 고맙지 아니할 수 없다.

되게 친절하잖은가. 그러나.....

지인은 카카오 톡상으로는 되게 다정하고 친절한데, 현실 세계에서는 낯을 가리는 성격 같다. 얼굴을 대면하면 말이 없어진다.

 나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고 한결 가까워진 마음이었는데 지인이 뚱하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니 할 말이 없어진다. 되게 뻘쭘하다.





2


그런가 하면 수업시간에 짝이 된 샘이 있는데, 원래 짝들이 수강을 그만두어서 남게 된 샘과 내가 뒤늦게 짝꿍이 되었다. 

수업시간에 짝꿍끼리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이 있는데 샘과 나는 의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법 재미있게 대화가 진행되면서 웃음보도 터지고, 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한결 친해진 느낌인데 거기까지다. 다음 수업시간에 만나면 언제 즐거웠냐 싶게 데면데면해서 누구 하나 선뜻 말을 꺼내지 않는다. 속으로 이럴 바엔 수업시간마다 대화 나누는 걸 넣던가 아니면 아예 다 빼버리던가 하는 게 낫겠다 싶다. 어쨌든 뻘쭘하다.





3


수업이 끝나고 같이 지하철을 타는 샘이 계시다. 한 세 번 정도같이 지하철을 승차했는데 이번에 그분 말씀이 이렇다.


"운동을 꼭 해야 해요. 50부터 달라져요. 60대 때 다르고 70대 때 또 달라요. 80은 아직 안돼봤지만 다들 그래요, 

80이 되면 거의 다 꺾인다고. 젊을 때 꼭 운동을 해야 해요. 

그래서 나도 많이 걸으려고 해요. 지하철에서 내리면 마을버스는 안 타고 걷죠."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는 잠시 갈등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운동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마을버스를 타러 가네요. 어쩔 수 없는 게으름쟁이 인가 봐요."


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젊을 땐 그렇게 돼요. 젊으니까."


너그러이 웃어넘기시는 샘 앞에서 뭔가 뻘쭘했다.





4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이어리 앞쪽에 써놓은 계획들을 찾아봤다. 올해 얼마나 야심만만하게 계획을 세웠는지가 보였다.

큰 줄기의 계획은 어느 정도 실행했지만 새롭고 야심찬 계획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는 데에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 나머지 외려 시작을 못한 것 같았다. 

나 스스로에게 뻘쭘했다.


어쨌든 손도 대지 못한 계획들은 고스란히 내년으로 이월했다. 내년은 좀 더 용감해지고 달라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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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해줄 수 없다.


- 캐롤 버넷 (Carol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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