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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Dec 28. 2019

재봉질은 어머니께

시즌6-017







1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감과 부자재를 구입해 와서 옷본을 대고 천을 재단했다.

재단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데 천을 펼쳐놓을 넓은 테이블이 없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펼쳐서 

몸을 쪼그리고 구부린 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재단을 끝내고 나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더라.

그렇게 재단한 옷감을 어머니께 패스했다.




2


다음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계셨다. 

다시 그 다음날, 어머니는 외출을 위해 옷을 갖춰입으셨다. 늘 입으시는 패딩에 색다른 바지를 매치하셔서 입으셨다. 

그 바지는 전날 만드신 두툼한 겨울 바지였다.

매끈한 옷감 재질에다 다리미로 잘 다려서 밑단이 말끔하고 날렵했다.

쉽게 주름지지 않는 원단이어서 한결 깔끔하고 격조 있어 보이더라.


그렇게 바지 한 벌 만드는 데에 쓴 비용은 옷감, 지퍼, 바지 걸쇠, 실까지 합해서 모두 5천1백 원, 

동대문을 왕복한 차비를 더해도 7천6백 원 정도.


그 가격으로 맞춤 바지를 마련하다니, 아, 싸다! 싸!





3


해피 엔딩이지만 나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어머니의 오래된 재봉틀은 내 손을 거부한다. 어머니가 사용하실 때에는 말을 잘 듣는데 내가 다룰 때에는 말을 잘 안 듣는다.

재봉틀이 약간 맛이 간 아이라서 어르고 달래며 사용해야 하는데 내가 그 어르고 달래는 걸 잘 못한다.

재봉틀에 안면 인식 기능이 있어서 주인인 어머니만 알아보고 복종하는 게 아니냐, 농담처럼 말하긴 했었다.

그렇게 재봉틀이 내 말을 안 들어서 나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옷 만드는 과정 중에 제일 재미있는 게 재봉질이다. 

나는 그 재봉질을 할 수 없어서 지루한 재단 과정까지만 해야 하고, 또 어머니가 당신의 옷을 만드실 때 나는 내 옷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나도 내 치수에 맞는 바지를 만들어 입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다.





4


넓은 작업 테이블을 떠억 설치하고, 공업용 재봉틀을 따악 마련하고, 오버록 기계까지 처억 준비하면 되게 기분 좋을 것 같다.

나만을 위한 작업대와 기계들이라니.. 아아.. 너무 좋을 거다.

생각난 김에 한번 예산을 짜 봤는데 중고품을 알아봐도 만만찮은 비용이다.


에라이, 양보(?) 했다. 공업용 재봉틀만 들여놓자.


...라고 마음먹어도 비용, 이동, 공간을 따지자니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또다시 재봉틀 마련 계획은 보류되었다.





5


어머니 바지 옷감을 재단하면서 한껏 생색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재단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바지를 만드실 수 없다는 걸 알고 우쭐대며


"어머니, 제가 갑이에요."


... 라고 한껏 어머니를 약 올렸다.


옷감이 바지 한 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남아있다. 

그걸로 내 바지를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재봉은 내가 할 수 없으니 어머니께 부탁드려야 하는데... 생색내던 만행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차마 어머니께 바지를 만들어 달라고 못하겠다.

하지만 비장의 방법이 있다.


그건...

그건... 애교를 떠는 것이다.



엄마아. 따랑해요. 으으응! 엄마아. 재봉 해두데요.


안통할 것 같은가? 그렇다면 2단계 방법이 있다.

그건, 그건 2단계 애교를 부리는 것이다.


어마마마. 소녀, 어마마마의 따랑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입고띠퍼요.


안될 것 같은가, 3단계 방법이 있다. 그렇다 애교다.


황후마마, 소녀... 어제 기싱꿈꼬떠요.




6


안되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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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 있는 행동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 

진실 있는 행동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


- 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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