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6-046
1
아버지는 알고 지내는 업체 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간단한 일이라며 그 일 하나를 내게 처리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업체에 가서 이것저것 문서 조항을 선택하려니 헛갈렸다.
서브웨이에서 꿀 조합 찾기보다 더 어려웠달까.
어찌 되었든 간에 내 나름의 숙고 끝에 조항을 선택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2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조항 중에 하나가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사실 변명을 하자면 몇 가지 댈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잘 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성난 말씀을 한차례 쏟아내시고 화난 것을 삭히실 때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여보세요 하고 잠시 들으시더니,
"아니야. 아니야. 수양딸이야. 내 딸 아니야."
그러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무슨 전화냐고 묻자,
"업체인데, '배져니씨라고 다녀가셨는데 굳이 조항을 B 타입으로 하셨더라고요. 따님분 아니세요?'라고 하잖아.
내 딸 아니라고 했어. 어디 가서 내 딸이라고 하지 마! 창피해서 원."
...라고 하시며 또 화를 삭이는 표정이셨다.
어머니랑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나의 경우, 속 편하게 웃을 입장이 아니었는데 무안함 반, 황당함 반, 그리고 뭔가 상황이 만화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오더라.
3
결국 업체에 가서 조항을 바꿨다.
업체 사람들은 큰 조항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부 조항을 바꾸는 걸 보고 사소한 실수였거니 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네, 수양딸이네, 하는 소리를 듣고 온 터라, 조금 기가 죽어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직원은 분명 뭔가 이상함은 느꼈겠지만 상황을 모르고 있는 터라 말문을 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돌아오니 그 사이 화를 다 삭히신 아버지가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셨다.
"하고 왔냐?"
...라고 말이다.
'네. 왜요? 양아버지?'
....라고 할까 하다가 혹시나 진짜 호적에서 파일까 봐 참았다. 크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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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만을 본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