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져니 Aug 01. 2020

딸 아님

시즌6-046




1


아버지는 알고 지내는 업체 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간단한 일이라며 그 일 하나를 내게 처리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업체에 가서 이것저것 문서 조항을 선택하려니 헛갈렸다.

서브웨이에서 꿀 조합 찾기보다 더 어려웠달까.

어찌 되었든 간에 내 나름의 숙고 끝에 조항을 선택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2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조항 중에 하나가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사실 변명을 하자면 몇 가지 댈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잘 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성난 말씀을 한차례 쏟아내시고 화난 것을 삭히실 때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여보세요 하고 잠시 들으시더니,


"아니야. 아니야. 수양딸이야. 내 딸 아니야."


그러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무슨 전화냐고 묻자,


"업체인데, '배져니씨라고 다녀가셨는데 굳이 조항을 B 타입으로 하셨더라고요. 따님분 아니세요?'라고 하잖아. 

내 딸 아니라고 했어. 어디 가서 내 딸이라고 하지 마! 창피해서 원."


...라고 하시며 또 화를 삭이는 표정이셨다.

어머니랑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나의 경우, 속 편하게 웃을 입장이 아니었는데 무안함 반, 황당함 반, 그리고 뭔가 상황이 만화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오더라. 




3


결국 업체에 가서 조항을 바꿨다.

업체 사람들은 큰 조항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부 조항을 바꾸는 걸 보고 사소한 실수였거니 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딸이 아니네, 수양딸이네, 하는 소리를 듣고 온 터라, 조금 기가 죽어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직원은 분명 뭔가 이상함은 느꼈겠지만 상황을 모르고 있는 터라 말문을 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돌아오니 그 사이 화를 다 삭히신 아버지가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셨다.


"하고 왔냐?"


...라고 말이다.


'네. 왜요? 양아버지?'


....라고 할까 하다가 혹시나 진짜 호적에서 파일까 봐 참았다. 크흣.






------------------------------------------------------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만을 본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 가족들과 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