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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Oct 31. 2020

노트북 안나

시즌6-059





1


내 노트북 안나는 10년 전에 나와 만났다.

당시 최신 제품이던 안나는 몸값이 매우 비쌌다. 그 비싼 값을 치르고 내 소유가 된 노트북이었지만 너무 귀하고 예쁘고 소중해서 쓰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실제 얼마간의 시간 동안 애지중지 아끼느라 충전만 해놓고 전원도 가끔씩만 켜고 막 그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끼다 똥 된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절감하고 나서 나는 안나를 좀 과감하게 대하기로 했다. 

수시로 안나를 사용했고 어느 순간 데스크톱 컴미보다 노트북 안나를 끼고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2


그렇게 그녀와 나의 협업은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안나의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배터리 교체 표시가 뜨기 시작했다.

충전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품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표시였다. 마음이 급해져서 바삐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상담원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고객님의 노트북은 단종이 되어서 더 이상 부품이 나오지 않는답니다. 지금 알아보니 재고 부품도 남아있는 게 없다는군요."


친절하게 절망적(?)인 사실을 말해주니 뭔가... 울고 있는 사람을 놀리는 얄미운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안다, 상담원은 잘못이 없다. 그냥 스스로 서글퍼서... 뭐.. 그렇다.




3


안나는 아직까지 노트북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조만간 전원을 연결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사용이 가능하다면야 크게 절망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게 어딘가. 

혹여 시스템이 다운되어서 먹통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그걸 노심초사하고 있다.




4


[너 아니면 안 돼! 나에겐 오직 너뿐이야! 

신이여! 우리 안나 건강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늘에 한 손을 뻗으며, 내리는 빗물과 솟아 나오는 눈물이 혼재하는 물방울을 줄줄 흘리며, 절규하듯 외치는 애절한 내 모습을 상상했던 게 불과 이틀 전.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까맣게 잊은 듯 새 노트북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폰 앱을 설치하면 추첨으로 노트북을 준다는 이벤트를 발견, 대번에 응모했다.... 흠.... 흠...


...흠.....안나..... 미안..




5


진지하게 말하자면, 안나는 내 인생의 첫 노트북이었고, 게다가 부모님이 나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마련해주신 선물이었다.

첫 노트북이라 소중했고 부모님의 마음씀이 담긴 배려의 선물이라 귀중했다.

진짜 생명체가 아닌 것은 알지만, 이런 안나가 어떻게 애틋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 나와 협업하는 생물처럼 여기고 먼지 낄세라 닦아주고 틈바구니에 잡티 들어갈세라 키패드 사서 덮어주고, 그래서 10년이 지났지만 큰 흠집 하나 없다. 

정말 소중한 첫 노트북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이쯤에서 다시 안나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말을 건네고 싶다.


안나야 미안해, 너 몰래 다른 식구 들이려고 했어.

그래도 안나야, 너도 동생이 생기면 좋지 않겠니? 

이벤트 당첨되라고 너도 얼른 기도해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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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일찍 인생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는 인생이 나를 위해 특별한 것을 해주기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으나, 나는 내가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한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은 내가 찾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났다.


-오드리 햅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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