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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Feb 13. 2021

보일러 고장

시즌6-074





1


며칠 전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기사님은 보일러 상태를 보시고는 '내일 아침에 와서 새 보일러를 설치하겠습니다.'라고 하시며 돌아가셨다.

날이 추운데 그 밤을 어떻게 보낼까 되게 걱정되었다. 

변변한 전기장판 하나 없는 데다가, 예전에 사용하던 온풍기도 버려버려서 그야말로 이 추운 날 이불 하나만 믿고 잠들어야 했다.

속으로 '추운 데서 잠들면 세상과 바이바이 할 수도 있다는데 오늘 그걸 보게 되는 것인가?'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2


다음날 아침, 다행히 가족 모두 건강하게 깨어났다.

건물의 보온력이 좋았고 때마침 겨울치고는 꽤 따뜻한 날씨라서, 거기에다 이불을 있는 대로 다 꺼내어 덮었더니, 춥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따뜻하고 상쾌하게 잠자고 깨어났다.

물론 일어나서 보니 실내 온도는 전날에 비해 좀 낮았다. 

그래도 걱정하던 것에 비해선 정말 '암시롱도 않았'다.




3


기사님은 아침 8시에 오셔서 설치를 하셨다. 나는 잠깐 방문을 열고 어떤 분이 오셨나 살짝 내다봤다.

뒷모습을 봤는데 평범한 젊으신 분들이셨다. 

하지만 전날 저녁부터 잠들기 전까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그분들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던지, 마치 그분이 우리 가족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신 원탁의 기사님 같이 느껴졌다. 기사님 살려주세욥!라고 외칠까 하다 말았다.




4


창을 열고 환기를 했다.

전날부터 냄새가 나지 않는 음식물로 저녁을 먹었다. 냄새 때문에 환기하다 보면 실내온열이 빠져나가니까, 안 그래도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실내온열까지 빼앗기면 잠자리가 너무 고단하게 될까 봐 꽤 신경 썼다.

기사님이 설치를 끝내고 가신 뒤, 후련하게 내 방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휘익 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부 공기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기분 좋게 서늘한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입춘도 지났으니 공식적으로는 봄이었다.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예전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봄이어서 운 좋게 우리 집은 '개고생'까지 겪지는 않았나 보다.




5


하지만 내가 좀 고생을 하기는 했다.

몇 년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온풍기와 전기장판을 갖다 버리셨고, 아버지는 이번 보일러 고장으로 맞이하게 될 밤을 대비하시느라 그것들을 찾았는데, 그게 버려졌다는 걸 아시고는 노하셨다.

어머니는 고장 난 걸 왜 갖고 있냐고 하시고, 아버지는 고장 안 난 전기장판은 왜 버렸냐고 하시고..

하여튼 내가 중간에서 등이 터졌다. 

(아이엠 어 쉬림프.)




6


보일러 고장으로 걱정과 번뇌와 환호와 전쟁과 고생을 겪었다.

아. 참 파란만장한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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