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5권째의 그림 연습장을 다 채웠다.
새 연습장에 '56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개시했다.
이 연습장은 작년에 홍대 근처에서 떨이로 파는 노트 노점에서 샀다.
권당 1천 원에 샀는데, 이게 글쎄, 종의 질이 끝내주게 좋은 거다.
두께가 두툼하고 표면도 매끈하다. 너무 좋은 종이에 미흡한 내 그림을 그려 넣으려니 왠지 황송하고 왠지 신성해지는 기분이다.
첫 장에 그린 그림은 망쳤다. 황송한 마음이 잘 그리려는 마음을 불러왔고 그게 부담이 된 나머지 엉망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예전 그림 연습장 1~3권을 채울 때도 그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한 장 한 장마다 최선의 그림을 그리려니 영 못 그리겠는 거다.
종이가 아깝고 걸작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리기가 주저되고...
그래서 한동안 달력이나 전단지 뒷면에다가 그림을 그렸었다.
'어차피 버리는 종이인데 잘 그려야 할 이유 없잖아. 마구 그리지, 뭐.'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막 그리는 연습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새 연습장에도 손가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
예전의 상황이 떠오르자 나는 손에 힘을 확 뺐다.
그저 55권의 마지막 장에 그린 솜씨 정도로만 그리자고 마음먹고 필살의 '막 그리기'를 시전했다.
역시 사람은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된다. 잘 그려지더라.
2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책꽂이에 쌓여있다.
그 책들을 내버려 두고 자꾸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다.
빌려온 책들은 반납일 전까지 읽고 갖다 줘야 하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꼭 지키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강제성 때문에 여하간 읽게 된다.
이번에는 <미운 받을 용기>와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대여하려 한다.
특히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읽으면 눈물이 펑펑 난다는 정보를 들었다.
한바탕 후련하게 울어서 심정을 촉촉하게 만들고 싶고, 또 요즘 눈이 건조해서 안구 물청소를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한껏 기대하고 있다.
두 권 모두 인기가 높아서 항시 대여 중 상태였다. 얼마 전의 어느 새벽 날에 체크해보니 다른 누군가의 신청이 일어나기 전이었는지 대여 가능 상태였다. 그 누군가가 신청하기 전, 어쩌면 직전, 운 좋게 내가 찰나의 순간에 끼어들어 책나래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수어 일을 벼르다가 대여할 수 있게 된 거였다. 집념의 책나래 서비스 신청 성공!
덩실덩실~ 유후~ 좋구나~~
3
어느새 11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마음이 다급해진다.
막상 딱히 끝내야 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일말의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 그림이던 글이던 독서량이던, 수치적인 증량을 위해서 안달복달 바둥거리고 있다.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참.
진즉에 열심히 살껄.
흐흐흐.... (흘러간 11개월이 아까운 나머지, 져니 실성함) 흐흐....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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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촛불이 되거나 또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 There are two ways of spreading light: to be the candle
or the mirror that reflects it. )
-이디스 워튼 (Edith Wharton, 미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