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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Sep 03. 2022

자잘스토리 7 - 040 - 이상한 벽







1


새벽에, 읽던 책을 35분 가량 마저 읽어서 완독했다.

이게 얼마 만의 완독인지 모르겠다.

새벽은 아직도 길게 남아있었고 물꼬를 튼 김에 이어서 다른 책을 더 읽어도 좋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2


그게 이상한 벽이 있어서 그렇다.

그건, 기록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




3


처음엔 시간 일기를 적느라 그랬다. 옆에 수첩을 두고 5분 단위로 일과를 적었다. 

그러다가 온갖 것을 적었는데, 지출계, 일기, 에세이, 전시회 감상록, 다 달의 시간 일기 결산기, 소원 일기 등등 그 외에도 독후감도 있었고 독서 목록도 있었다.

독후감은 읽은 책에 대한 단상을 적는 것으로 종이 노트가 아닌 텍스트 파일로 저장했다. 

완독한 책은 한눈에 볼 수 있게 독서 목록도 파일로 작성해 저장했다. 그러던 것이 점점 더 세밀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독서 목록의 경우 읽은 날짜와 제목, 저자, 출판사 정보를 적는 정도였었다.

어느 순간 초독인지 재독인지 체크하기 시작했고, 권당 페이지 수와 종류별 분야도 적기 시작했다. 

또한 수년간 읽은 책의 권수가 몇 권인지 엑셀로 정리하기 시작했고 초독의 권수와 재독까지 합친 권수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도 적기 시작했다.

연말이면 독서 목록에 적힌 책 숫자와 독후감 파일의 숫자가 같은지 확인을 해서 딱 맞아떨어져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하다 보니 독서 목록에 올리려면 독후감을 꼭 써야 하겠구나 하는 하나의 규칙이 생겼다.




4


'꼭 해야만 하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것은 없다.

출석이나 출근은 꼭 해야만 하는 것이어서 힘든 것이다.

처음엔 '해놓으면 좋을 기록' 같아서 했지만 하다 보니 '꼭 해야만 하는 기록'으로 변모해서 어렵고 힘들어졌다.

딱히 강제하는 사람도 없는데 안 하면 되지 않나 싶은데 또 그게 용납이 안된다. 

하던 거니까 꼭 해야만 할 것 같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책 한 권을 완독하면 기록해야 파일이 서너 가지이다.

그 기록들이 단순히 체크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첨언, 사색, 감상, 발췌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신경 써서 작성해야 할 것들이었다. 

책을 읽을까 생각하다가도 써야 할 서너 가지의 파일을 생각하면... 그 기록을 적는 데 드는 시간과 신경 씀을 떠올리면.....

흠... 책 읽는 게 두렵다. 진짜 신경 쓸게 많고 손이 많이 가며, 생각만으로 피곤하다. 

독서를 하면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글을 써야 했으니까 말이다. 

아... 떠올리기만 했는데 그냥 막 힘들다.




5


그래서 올해는 자유로움을 부여했다.

독서 목록 적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으니까 적되, 독후감 등은 쓰던지, 말던지, 기분 것, 마음껏, 자유롭게 놔두기로 했다.




6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자율권을 주었더니 글쎄 독서량이.... 확 ... 줄었다.

당연히 그럴 것을 알았지만 너무 안 읽어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긴 올해 내가 방송 시청으로 시간을 너무 보냈지... 만... 너무 안 읽었다.

신경이 좀 쓰이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자율권을 줬는데 좀 사용해 보기도 해야 하지 않겠나.




7


아까 책을 완독하고 나서 잠시, 올해 완독 목록을 늘리려고 곧바로 다른 책을 꺼내려고 했지 뭔가. 

그것도 '글쓰기'관련 책을 꺼내려고 했다.

나를 애써 말렸다.


져니야, 너 왜 자꾸 공부하려고 해?

나, 너 요즘 영어 문제집 푸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왜 자꾸 공부하려 해?

글쓰기 책이 웬 말이야, 좀 놀아.


바로 수긍하고 글쓰기 관련 책을 한쪽으로 치워놨다.

이렇게 된 거 연말까지 주욱 놀아볼까 싶다가도 일말의 죄책감이 생겨서 주욱 놀지는 못하겠고 책은 재미 위주의 소설책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8


이상한 기록 벽이 있어 모든 것을 기록해버릴 듯 부산스럽게 자판을 치던 때가 있었다.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숨통이 트이는 해방감을 느끼면서부터야 내가 습관에 씌여서 제대로 숨을 못 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9


이제 '적당히'의 '미덕'을 찾을 때이다.

전문 용어로는 '중용'쯤이려나.

많이 크게 완벽하게.... 이런 거 찾다가 골병든다.

올림픽 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기록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




10


가을이다.

그래도 가을은 하면 독서의 계절!

유행(?)에 맞춰 독서를 하고, 힙(?)하게 기록을 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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