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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Jun 03. 2023

자잘스토리 7 - 079 - 발견할 수 있어








1


아버지가 은행 업무를 보시려는데 내가 동행했다.

도착해서 절차상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해야 했는데

요즘은 태블릿에 전용 펜으로 서명을 하지 않던가.

아버지는 내가 건네드린 펜으로 액정에다가 멋들어지게 이름 석 자를 쓰셨다.




2


확인하던 직원분이 말하길,


"너무 흘려쓰시면 입력이 안돼요. 또박또박 다시 써주시겠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정자로 또박또박 쓰셨다.

그러나 거의 직각으로 세워진 태블릿 화면에 

익숙지 않은 자세로 글자를 쓰시는 게 그리 편할 리 없으셨다.

때문에 정자로 쓰셨지만 왠지 아이들 글자 같은 느낌의 정자가 나왔다.




3


그서류라는 게 이름을 한 번 쓰고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경우엔 성함을 무려 5번쯤 쓰셔야 했는데

3번째 쓰실 때 아버지가 그러셨다.


"이것도 자꾸 쓰니까 글씨가 나아지네. 아까보다 낫지?"


...라고 하셔서 나는 쓴웃음을, 직원분은 '풋'하고 웃음 지었다.




4


아버지는 가끔은 아주 예민하신 것 같은데 때로는 아주 낙천적이시다.

비교적 낙천적이시고 유머러스하시기는 한데

당신도 모르시는 사이 그 낙천성이 천진난만하게 드러나셔서

나로서는 어리둥절하다가 자랑스러워 질때가 있다.

이날 '주임' 직함의 그 직원분은 아버지의 그러한 성향의 말씀 때문에 대략 4번쯤 웃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밝은 성향이 자랑스러웠다.

그 주임분에게 아버지가 인출하는 금액에, 그 주임분 자신의 웃음 값으로 

5만 원을 더 얹어서 내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5


아버지는 등산을 너무 자주 오래 하신다.

등산을 다녀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이신 탓에 기력이 쇠하셨나 보다.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다리가 후들거리시는 게 보였다.

당신 스스로도 위태위태하셨는지 계단 난간기둥을 잡고 의지하셨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기억엔 얼마 전까지 이런 체력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헤아려보니 아버지와 단둘이 동행했던 그 '얼마 전'이 무려 10여 년 전인 것을 알았다.




6


어머니는 천천히 쇠잔해가시는 걸 봐서 마음이 아프고

아버지는 부지불식간에 느닷없이 쇠약해지신 걸 알아차리고 가슴이 저리다.




7


감사하다.

부모님의 연로해가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기쁘다.

적어도 그 발견에 내 가슴이 아프고 저리고...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라서,

적어도 내가 '몹쓸 자식'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8


오늘의 동행이 나에겐 정말 많은 감정을 동반해서

안 그래도 밤을 샌 뇌에 무리가 왔는데

결정타를 먹인 듯 먹먹했다.

집에 돌아와서 결정타 먹은 뇌는 수면에 들었다.




9


이제 일어나서 곱씹어 보고, 되뇌어 보고...

생각이 많아진다.

'만시지탄'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살아실 제 섬기기'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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