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전 10시 반쯤.
옥상에 계신 어머니께 시원한 오이를 전달하러 올라갔다.
어머니는 오이를 손으로 뚝 잘라서 나눈 하나를 내게 건네주셨다.
말없이 오이를 받아서 아작아작 깨물어 먹다가
옥상 가장자리, 화분으로 조성된 꽃밭에 눈길이 갔다.
알록달록, 꽃들이 그야말로 만발!
예뻤다. 대화가 시작되었다.
2
"어무니, 이 노란 꽃 이름이 뭐예요?"
"달맞이 꽃. 저쪽에 그 화분이 하나 더 있어. 잘 자라고 있어."
3
"제라늄이 하얀색, 연분홍, 빨강, 세 가지나 있네요?"
"하얀색이랑 연분홍은 한 송이씩 피어나고 색이 예뻐.
하지만 빨강 제라늄은 수국처럼 동그랗게 뭉쳐 피어나서
꽃송이로 보기엔 빨강이 더 예뻐."
4
"수국은 화분이 3개라더니 지금... 여기 여기.. 2개... 하나는 어딨어요?"
"수국을 몇 년 키워서 화분이 3개가 되었는데, 하나는 누구 줘버렸어.
아끼는 거라 큰 마음먹고 줬는데, 그 사람이 아파트 쉼터에 심어놓았대.
쉴 때 내려가서 보려고, 물도 주고 키우려고 심은 건데,
어느 날 가보니 누가 뽑아가고 없더라네. ..... 아끼는 거 준 건데..."
5
"꽃기린 꽃잎이 아주 탄탄하고 색이 고와졌어요.
전에는 이렇게까지 예쁘진 않았는데..."
"빨간 색이 예뻐졌지?
그땐 집안에서 키워서 그렇지.
지금은 볕 보고 크니까 빨간색이 곱고 예뻐졌어."
6
"까치가 꽃씨를 옮겨왔나 봐. 나는 코스모스를 심은 적이 없는데, 뭐가 자라서 놔뒀더니 코스모스인 거야, 봐라, 꽃이 두 송이나 폈어."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거 아니에요? 지금 때가 아닌데?
크레이지 코스모스...?"
7
"정말 까치나 새가 꽃씨를 묻혀오는지, 여기 이거, 백일홍이야."
"아직 꽃이 안 피었는데요? 어떻게 아세요?"
"보면 알아. 백일홍이 맞아. 이것도 내가 안 심었는데
여기에 자라고 있더라고."
8
"어무니, 이건 내가 알기로 1년 초인데?
이게 올해에도 여기에 있는 건, 왜죠?"
"응, 그거랑 여기 이거는 예뻐서 또 사 왔어.
몇 년째 계속 사 오고 있어."
9
"어무니, 이건 무슨 꽃이에요? 아우, 쬐끄맣게 피는 꽃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죽겠네요."
"아, 그거 안개꽃이야. 안개꽃이 그렇게 분홍색이더라고.
작은 꽃이라 떨어질까 봐, 이 줄기 무더기를 살짝 들어주고 물을 주고 있어.
뿌리 쪽에만 가만히 물을 주는 거지. 엄청 빨리 자라.
처음엔 요만큼 가져와서 심었는데 이렇게 3배나 커졌어.
올망졸망 너무 예뻐."
10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한 화분으로 가셔서
그 화분의 꽃송이를 뚝뚝 손으로 끊어내셨다.
방금 전까지 꽃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드러내시던 분이
뚝뚝 거침없이 꽃줄기를 끊어내자 나는 당황해 버렸다.
"어..어무니.. 왜 끊어내시는 거예요?"
"응. 이건 다 져버려서 말라죽었잖아. 이런 건 떼내어 줘야지.
보기 싫잖아."
그러시면서 이번엔 다른 화분의 꽃망울을 뚝뚝 끊어내신다.
"어무..니? 그건 꽃이 필 텐데 왜 자르세요?"
"여기 꽃망울이 너무 많아. 이렇게 너무 많으면
영양분이 부족해서 꽃이 예쁘게 안 피어. 끊어줘야 해."
내가 약간 '잔인하신 분'이라는 눈초리를 보낸다고 생각하셨는지,
"봐, 여기 꽃망울이 많다니까.
여기 가지마다 꽃망울이 또 올라올 걸. 너무 많아져."
...라고 하시며 그 후로도 6개쯤 끊어내셨다.
11
생명에게 기울이는 다정하고 세심한 관심과 태도에, 나는 아주 경건해졌다가,
느닷없이 손톱으로 또옥, 똑 끊어 죽여버리는 상황에, 호러라고 생각하다가,
심정적으로는 만류하고 싶다가도 이유를 알고 나니 이해는 되는,
되게 입이 마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웃기기도 하고, 썩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12
이러나 저러나, 옥상 정원은 어머니의 공간인 게 확실했다.
옥상 출입문에 그녀의 공간이라는, 그런 표식을 달아드리고 싶어졌다.
근사한 이름을 찾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