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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Aug 05. 2023

자잘스토리 7 - 088 - 모여 괴인 것







1


거실 에어컨은 잘 작동시키지 않는다.

거실과 주방을 아울러 냉각시키려면 공간이 넓어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기세를 줄이고자 우리 가족은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2


아버지는 안방, 어머니는 거실과 어머니 방, 나는 내 방에서 각각 머무르며

주방이 아니면 별로 마주칠 일 없는 가족이,

그 치명적인 더위에 맞서 벽걸이 에어컨의 비호를 받고자 안방에 모인 것이다.




3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는,


"나는 더워도 나 혼자 있을 때 안방 에어컨을 켜지 않겠어.

나만 시원하자고 그러지 않을 거란 거지.

가족 모두 모였을 때만 켜겠다는 거야."


...라고 하시더니 정말 매해 여름 그 말씀을 실천하셨다.

새 에어컨을 설치한 이래 늘 그러셨다.

에어컨 구입한 해가 언제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에누리 해도 10년은 넘었고,

10년은 물론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그 말씀을 지키셨다.




4


얼마 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아버지는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외출하셨다.

어머니와 나는 늦은 저녁으로 냉면을 먹으며 열기를 다스리고 있을 때

비교적 이르게 귀가하신 아버지를 대면했다.

가볍게 약주 한 잔을 하셨다는 아버지의 안면이 벌겠다.


"날이 덥다, 너무 더운데. 그냥 자야겠다."


...라고 하시더니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우리 모녀는 식사를 마저 끝내고 나는 설거지를, 어머니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시는데,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5


컴컴한 안방에서 아버지가 모녀를 부르셨다.


"도저히 안 되겠다. 너무 덥다.

나 혼자 있는데 (에어컨을) 켤 수는 없으니, 얼른 들어와라.

술 마셔서 더 더운가 봐."


아버지는 건강이 좋으셔서 더위, 추위에 강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이날 약주로 인한 체온 상승과 열대야로 10년의 신조가 무너질 뻔했다.


내가 처음에 웃고 만 이유는,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시다, 에어컨 냉기를 혼자 만끽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렇게 더워서 못 견딜 상황에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가족을 안방으로 급히 소환하시는 그 모습이,

그것도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신조를 지키려고 하는 그 모습이 감동스러운데,

그 노력이 소박하게 에어컨 켜는 문제라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6


내가 마지막에 웃고 만 이유는 무엇인지 아시는가?

벽걸이 에어컨 켜는 것에 대한 룰을 지키시려고 뭘 그리 애쓰시나 싶었다.

그 사소한 룰은, 에어컨 없는 방의 처자식은 더위에 고생하는데,

부모가 되어서 에어컨 호사를 단독으로 누리는 건 미안한 일이라는 아버지의 기조였고,

그 기조대로 룰을 10년 동안 한결같이 유지하신 것이다.

에어컨을 구입한 지가 10년이지, 미루어 생각해 볼 때,

과연 그런 성향의 마음이 10년 뿐이었겠는가.




7


오늘은 낮에 무지하게 더웠다.

가족이 안방에 모여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전기세는 여전히 비싸고 에어컨 리모컨을 누르는 것 또한 여전히 부담스럽다.

우리 가족은 진정 전기세 절약을 위해 한 방에 모였다.

아마 그 순간 절약된 세금이 모이고 있었을 테고, 또 모여 괴인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리라.

웃고 만 이유를 아시겠는가?




8


좋아서.

좋은 아부지가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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