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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Aug 12. 2023

자잘스토리 7 - 089 - 약이 올라서







1


냉장고의 생크림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

판나코타를 만들려고 하나 사다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턱하니 코로나 19에 감염이 되어버렸지 뭔가.

방에 자가격리 되어 나갈 수 없으니 만들 수 없다.




2


사실 가족들 주무시는 새벽에 나가서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 놓은들 찜찜하지 않겠나 싶었다.

증세가 심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나는 감염자이고

일이 틀어지려면 마스크를 해도 새어 나오는 입김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튀어나와 생크림에 안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냥 깔끔하게 생크림 한 팩 버리기로 했다.




3


그런데 말이다. 내가 이제 회복기인데다가,

먹는 거 그냥 버리면 죄 받는다는 걸 믿는 편이라서...

어휴, 차라리 미신을 믿지, 왜 음식 버리면 죄 받는다는 걸 믿는지.. 아무튼.

그래서 생크림 팩을 열어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다. 

기한은 지났을 것 같은데 의외로 상태가 좋다면 요리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4


이상스럽게 부모님은 내 방에 물이나 식사를 넣어주시며 내 얼굴을 확인하시더라.

내 생각에 한 번 걸려보신 분들이시니 그 고약한 병세를 또 겪고 싶지는 않으실 터,

방문 앞에 음식물을 두고 방에 노크로 기별을 주시면 될 텐데,

의외로 방문을 살짝살짝 열어서 말을 거신다.




5


'내 딸의 안부를 살피고 싶다, 코로나 따위는 상관없다, 딸을 봐야겠다.'


...라는 뉘앙스인가 싶어서 슬며시 감동했다가, 아무래도


'코로나 걸려봤는데 별 거 없더라, 딸을 봐야겠다, 놀려야 하니까.'


...라는 느낌이라서 약오른다.




6


특히 아부지께서


"나와서 먹으면 반찬 가짓수가 더 많은데..."


...라고 하시거나,


"식탁엔 바람 불어서 시원해서 밥맛이 더 좋은데..."


...라고 하시는 등, 정말 사소하게 약을 올리셔서, 근데 정말 약이 올라서,


'겨우 하찮은 그런 말들에 약이 오른단 말이야?'


...라고 자문하고 나서야 진정 상태가 되었다.

약이 오른데 웃기면 더 약오른 느낌이라서 참 힘들다.

물론 나는 지금 진정되었다.




7


빨리 밤에 판나코타를 만들어 봐야겠다.

만들어 놓고 떡 하니 보여드리고


'감염자가 만들었으니 드시지 마세요. 나는 먹어도 되니까 먹어봐야겠어요.

아픈 뒤 먹는 맛있은 간식은 얼마나 더 맛있을까요? 안 아프셨으니까 드시지 마세요.'


...라고 부모님을.... 특히 아부지를! 도발해보올까아~?




8


내일 병원에 가서 하루 이틀 치 약을 더 받아 복용하면 완치될 듯 싶다.

오늘 비가 제대로 와 버렸는데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네.

아무튼 대기 미세먼지도 내 코로나도 태풍이 몰아쳐서 싹 다 쓸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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