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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Apr 20. 2024

자잘스토리 8 - 016 - 아버지와 면도기  






1


지난달에 아버지께 전기 면도기 하나를 선물해 드렸다.




2


사용하고 계시던 전기 면도기도 십몇 년 전에 내가 사드린 것인데,

그때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좋은 것을 사드리지는 못했다.

마음은 최신형을 사드리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긴축재정 상태였는걸.

그때 면도기들은 약간 날렵한 디자인으로 변모하는 시기였고 

그런 최신형을 구입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되어서, 

품질 좋은 회사의 것으로 구입하되 

약간은 구버전 디자인의 전기면도기를 구입했던 것이다.


그래도 새것이니 싫어하진 않으시리라 믿었지만, 

아버지는 받으시고는 악의 없이,


"(지금 쓰고 있는 것과) 별다를 게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는데 그 말씀이 꼬챙이가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그 이후 내내 그 면도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3


이번에 그 면도기를 보니 많이 낡아 있었다.

아버지께 넌지시 여쭈니 잘 작동된다고는 하시는데, 

내가 슬쩍 작동 버튼을 눌러보니 위잉 돌아가는 소리도, 기분 탓인지,

시원찮은 것 같고 외관은 확실히 닳고 때가 타 있었다.

그래서 하나 선물해 드리기로 하고 웹을 검색, 

과거의 심장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신형 면도기를 알아봤다.

검색창에 최신 전기 면도기 상품이 좌라락 뜨는데... 제일 좋은 것이...


응? 50만 원?

미쳤나 봐!!!




4


좋은 것을 사드리겠다는 거대한 효심도 

높은 상품 금액 앞에선 쪼그라드는 풍선에 불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면도기가 50만 원인 건 과했다.

이번에도 차선 상품을 선택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차선이되 최선을 보여드릴 수 있는 상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슷한 성능의 제품군 내에서 가장 예뻐서 좀 더 비싼 제품으로 결정했다.

주문, 구입, 수령, 아버지께 드렸다.




5


아버지는 "아직 쓰는 게 멀쩡한데 왜 쓸데없이 샀냐."라고 하시지만, 

싫은 듯 좋아하시며 선물의 핵심,


"얼마 주고 샀냐?"


...라고 물으셨다.

그 말씀에 웃음이 났으나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고 나서,


"최신형은 50만 원이래요. 그건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아무튼 쓰던 건 낡았으니 버리시고 이거 쓰세요.

이거 한 15년 쓰시고 고장 나면, 

그땐 최신형 하나 더 사드릴게요. 그럼 그것도 한 15년 쓰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숫자를 들으시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럼 내가 몇 살까지 사는 거냐?"


"30년 더, 사세요."


아버지가 잠시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시더라.




6


적지 않은 가격의 상품, 꽤 예쁜 색상과 모던한 디자인, 믿을만한 브랜드의 제품,

그리고 당신이 이뻐 죽어하는 딸내미의 애정 멘트.

크아... 내가 아부지였어도 감동하고 만다.




7


그런데 말이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선물을 해드린 상황이다.

내가 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보니, 죄송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잠시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께 말씀 올렸다.


"아부지, 대신 어버이 날 선물은 없어요."




8


지난달에 건네드린 면도기를 아버지는 오늘 개시하셨다.

아버지는 사용 중인 면도기가 수명을 다 하면 새 것을 사용하겠다고 하셨는데,

내 추측엔, 새 면도기가 너무 예뻐서 얼른 사용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의 말씀을 어기신 것 같다.

당신께서도 번복하는 것이 어색하셨던지 괜한 이유를 대신다.


"내가 쓰던 면도기는 너 써. 팔이나 다리 제모할 때 써."


응?

다리 제모?

난 안 하는뎅?

왜 나 갖구...




9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지 뭔가.

아부지, 5월엔 아무 선물도 안 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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