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놓고 있다.
그닥 중요하게 걸려올 전화 용무가 없기도 하고,
벨이 울려서 보면 스팸 전화일 경우도 다수고,
알림음을 확인해 보면 광고성 문자일 경우도 꽤 된다.
2
어차피 친구도 별로 없어서 찾는 사람이 드문 데다가,
예민하게 알림음에 청각을 곤두세우는 게 피곤해져서,
전원을 끄기는 좀 그렇고, 무음 모드로 두고 있다.
3
그렇게 기능을 제한해두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싶었다.
예를 들면, 공모전 주최 측에서 당선 통보를 보냈는데
확인 수신을 안 해서 당선이 무효화 된다거나...
물론 공모전에 응모한 적이 없다.
또는, 사랑하는 그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보호자 연락을 걸어왔는데 그걸 못 받았다거나....
물론 그가 없다.
아니면, 카드 포인트 1만 점 소멸시효가 내일이라고 문자가 왔는데
확인을 못해서 못 쓰고 그대로 포인트를 날린다거나...
물론 포인트가 없다.
아무튼 피치 못할 연락과 문자를 확인하지 못해서
난감한 상황이 생길까 봐 약간 염려는 되었다.
무음 모드로 돌린지 약 1달이 되어가는데 거의 아무 문제가 없었다.
4
'거의'라는 단어에 희비가 엇갈린다.
일단 정말 중요한 공적 연락은 단 한 것도 없어서 비애감이 느껴지는데,
'거의'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몇 건의 전화가 있어서 '희'가 느껴졌다.
그 몇 건의 전화라는 것이 옥상에 올라가신 어머니가
'옥상으로 가위랑 끈을 가져오라'라고 연락하신 경우였고,
역시 나를 찾는 이는 나의 러버, 어머니 시구나 싶어서 '희'가,
당연하지만 그 통화를 못 받았고
때문에 심부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희'가,
그러나 어머니께서 '네가 뭐가 바쁘다고 소리를 꺼놓는 거야?'라고
핀잔을 주셔서 '비'가 느껴졌다.
5
요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꾸 희비가 엇갈린다.
침착해질 수 있을까 싶어서 더 침잠하려고
폰의 무음모드를 앞으로도 유지하려 한다.
어머니의 심부름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옥상에서 내방까지 컵에 실 달은 전화를 설치할까 생각도 해본다.
6
길은 사방팔방 여러 갈래이고,
그 길의 종류도 땅길, 흙길, 사랑의 길, 즐거움의 길
성공의 길, 행복의 길, 느린 길, 빠른 길 등등 많고도 많으며,
가고자 하는 길을 마음과 구미에 맞게
종류와 성향을 선택하면 되긴 한다.
그 선택의 순간 필요한 건 판단할 수 있는 지력이고,
그건 장착이라고 부르던지 착장이라고 부르던지 아무튼 지녀야 하는 것이다.
7
희비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
주문한 원두와 책이 도착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책을 뒤적여봐야겠다.
착장하기 위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