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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스토리 8 - 082 - 새침한 등, 능동적 팔

by 배져니






1


아침나절에 써야 하는 글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면 되는 글이라

신경을 많이 안 써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글쓰기가 녹록지 않았다.


오전부터 찜통더위라서 에어컨을 켜놓았다.

어머니가 내방에 오셔서 폰으로 유튜브 시청을 하셨다.

배려해 드리느라 내 컴퓨터로 재생하고 있던 음악은 껐다.

그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좀 섭섭했는데

어머니의 폰 영상 소리가 쩌르렁~! 쩌르렁~! 해서

도저히 글 쓰는 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편하게 쓰는 글이라서 이래저래 글을 완성할 수는 있었다.




2


점심을 먹고 다시 글을 쓰려고 앉아 있자니

어머니가 내방에 들어오셔서 소녀처럼 재잘재잘 말씀을 하셨다.

예전에도 곧잘 말씀하셨지만 왠지 오늘은

어머니의 말수와 속도와 어조가 색달라지고 빨라지셨다.

요즘 어울리는 어머니의 지인분들이 한 수다력 하시는 분들이시던데,

그 영향이신가?...라고 생각하다가 퍼뜩 쓰던 글을

마저 써야 한다는데에 생각이 가닿았다.

그래서 타이밍을 봤다.

어머니의 수다력이 점점 레벨 업되시어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어무니, 저 글 써야 돼요. 주문처럼 혼잣말하시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라고 응답하시고는 침대에 턱 누우시며 조용히 계셨다.

나는 다행을 느끼며 곧바로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문득 어머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작은 등을 보이시며 돌아누우신 모습이

마치 삐진 소녀처럼 새침해 보였다.

나는 어머니께 약간의 죄송스러움을 느껴서 완화된 조건을 내어드렸다.


"어무니, 폰으로 영상 보시는 건 돼요. 심심하실 테니 보세요."


...라고 말하자마자 어머니의 팔이 바쁘게 폰을 집어올리시더니

손가락으로 토톡 화면을 치며 영상을 재생하셨다.


"... 보세요."...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침하게 무기력하던 자태가 없어지시고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니가 말했으니 이제 본다, 나는 너 존중해 줬다.'


...라는 뉘앙스를 뿜어내시며,

'폰을 들면서 영상을 켜기'까지가

너무나 능동적으로,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아까 새침했던 등판은 어디 가셨나?


나는 그게 너무 웃긴데... 달리 뭐라고 표현은 못 하겠고,

그 와중에 어머니가 볼륨을 줄이시는 게 보이니


'음.. 저 행동은 진정 참 존중이 아니던가!'


...라고 생각되므로, 참 즐겁고 행복해져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3


요즘 우리 부모님은 뭔가 이런저런 대화를

수다처럼 나누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말벗이 되어드리는 데에는

화자나 청자의 역할에 능숙한 딸이 더 나을 법하다.

나는 글자를 쓰려고 관찰자의 능력을 길렀을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귀여운 모습을 관찰, 발견은 했는데

말로 재미있게 어머니 당신께 전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나중에 '세상 최강 귀여운 어머니상'을 서술할 기회가 있을 때

울 어머니의 '새침한 등판, 능동적 팔놀림'을 꼭 언급해 보련다.


이상, 내방의 한때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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