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시감에 시달리고 있다.
뭔가 전에 한 번 말한 것 같고
들어본 것 같고,
심지어 새롭게 맞닥뜨리는 상황에 대해
내가 행하는 말이나, 글이나, 행동까지도
이미 내가 전에 말했거나, 썼거나, 행했던 것 같다.
이 엄청난 기시감들의 부작용은,
어쩐지 이러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라는
역시 기시감 어린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기시감 어린, '떠오르는 생각'은 미래적이라
자칫 예언적일 수도 있겠다.
마치 스토리 쓰듯이,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뒤에는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맞지....라고
뇌에서 작법론을 펼치며, 신나게 소설적 이야기를 전개하는 느낌이다.
2
수년 동안 소설은 물론 콩트도 쓴 적이 없다.
딱히 바쁜 건 아니었는데... 이럴 때 써먹기 좋은 변명은...
심적 경황이 없었다....라고 하면 되던데, 훗.
팬데믹으로 집에서 간식 만들기에 열중하다가
좋은 기회가 있어서 앱을 배우러 다니고...
다시 집순이로 자리매김한 후
웹 쇼핑에 맛 들여서 통장에 빵꾸날 뻔하고...
그 상황들을 다 이어붙여 말하다 보면,
진짜 경황이 없었던 걸 증명할 수 있다.
자잘한 상황들이 많고 많아서 차분히 뭔가를 할 여지가 없었다.
정말 경황이 없었던 것으로, 영양가 없는 상황들이라서
'그냥 놀았던 거 아니냐?'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뿐이지만,
겪어낸 나는 진짜 경황이 없던 것이 분명했다.
근데 그렇게 경황없이 지내면서 기시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늘 새롭고 색다른 상황들이었고, 놀았던 거라고 비판해도,
나는 열심히 그날들을 살아냈고 충실했다, 진심으로.
근데 불과 반년 동안, 나는 너무 많은 데자뷔를 느낄 따름이다.
그것도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다.
소리를 듣거나, 사진을 보거나,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이걸 전에 들어봤고, 이걸 전에 본 적이 있고,
이런 메시지를 보낼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은 거다.
3
뇌과학적 설명으로 기시감이라는 것은 '가짜 익숙함'이라는데...
이런 기시감은 창작물에서 평행세계 설정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과생 출신으로 평행세계 설정을 믿기도 그렇고, 안 믿기도 그렇다.
하지만 만약 기시감이 있고 예언적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본 것 같은 경험을, 기시감을, 예지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신에게 묻고 싶다.
4
'대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숫자 여섯 개는 왜 안 보여 주는 거예요?
숫자 여섯 개를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미리 느끼고 싶다고요.
그래야, 로또를 살 거 아닙니까!'
5
그렇게 생각하면서 10년 동안 로또를 사 본 적이 없다.
집순이라 나가지 않는다.
그냥 기시감도, 예언적 기시감도 집순이에게 쓸데없다.
그래도 일단 숫자가 보이면 편의점에는 가볼 의향이 있다.
6
지인에게 축전을 보내놓고, 또 기시감에 빠졌다.
보낼 메시지의 내용을 이전에 알았던 것만 같다.
이런 기시감은 잘 느끼게 하면서,
신이여, 숫자는 왜...?
-끝-